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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인물/정이철

불후의 확증편향 환자가 그 확증편향을 스스로 증명한 글을 쓰느라, 참 고생했다. 축하한다.

by 깨우는자동훈 2022. 10. 2.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개혁 정론}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

http://reformedjr.com/index.php?document_srl=1039769&l=ko...

 

 

    다음은 위 링크 글에서 옮긴다. 약간 고친다.

    그리스도 능동 순종 교리를 반대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까닭은 다음과 같다.

                …(중략)…

    4) 그리스도 능동 순종 교리는 칼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주로 ‘칼빈 {기독교 강요}’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칼빈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독교 강요}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엄청난 주석도 참고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설교문이나 신학 논문도 살펴야 한다. 칼빈에게서 ‘능동/수동 순종’의 용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그 개념은 나타난다. ‘칼빈’과 ‘칼빈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 차이를 너무 강조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칼빈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칼빈의 개념을 더욱더 발전케 해 더욱 정교하게 개혁신학을 변증했는데 ‘능동/수동 순종’의 구분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16세기 칼빈의 시대보다 17세기 중엽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여러 교묘한 이단들이 많이 생겼고,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들에게 신학적인 응전을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기독교 강요}에서 보고 싶은 구절만 본 나머지 {바른 믿음}에 <존 칼빈 신학에는 그리스도 율법 순종의 의 사상이 전혀 없다.>를 씀으로써 스스로 확증편향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했던 세기의 벽창호1)가 언제쯤 위 글을 다룰까?’ 생각하고 있었다.

 

 

{바른 믿음} 정이철 [고신 총회는 능동 순종 신봉하는 교수들 파면하고 칼빈주의 신학 수호해야 합니다.]

https://archive.ph/IomAI

※ 편의상 아래에서 [칼빈주의 수호해야 합니다.]로 적는다.

 

 

    목사가 아닌 개그맨이 됐으면 좋았을2) 예장 합동 꼴뚜기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들뜬 마음으로 [칼빈주의 수호해야 합니다.]에서 “제가 저들이 주로 왜곡하여 이용해 먹는 칼빈의 말들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역시 심각한 왜곡이었고, 거의 범죄 수준이었습니다. 저들이 주로 왜곡하여 이용했던 칼빈의 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말하며 ‘칼빈 <로마서 5장 19절 주석>과 <고린도전서 1장 30절 주석>’에서 글을 인용한다. “심각한 왜곡”으로서 “거의 범죄 수준”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을 보면, 목사가 아닌 “검사보다 촉 좋은 형사”3)가 됐으면 좋았을 뻔했다. 대단한 발견을 하느라, 참 고생했다. 형사와 같은 촉으로 대단한 발견을 함으로써 “능동적 순종 노승수, 김병훈 교수 건은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한 분명한 성경적 근거는 잘못됐다.”는 지난해 예장 합동 총회 이대위 발표를 수호해서 축하한다. 그러나

 

    세기의 듣보잡이 ‘칼빈 <로마서 5장 19절 주석>과 <고린도전서 1장 30절 주석>’에서 옮긴 글은 부분 인용으로, ‘{바른 믿음} 정이철 <존 칼빈 신학에는 그리스도 율법 순종의 의 사상이 전혀 없다.>’와 똑같이 확증편향을 스스로 증명한 인용이다. 또한 ‘그리스도 본질(신성)의 의, 그 의의 전가’를 위해 “(처음부터)”를 집어넣음으로써 ‘칼빈 <로마서 5장 19절 주석>’을 왜곡한 글이다. 다음은 [칼빈주의 수호해야 합니다.]에 예장 합동 꼴뚜기가 옮긴 칼빈 선생님 주석이다.

    “바울은 우리가 정죄되었고 아무도 자신이 무죄하다고 주장하지 못하며,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정죄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의로워졌다고 선언했으므로, 우리는 아버지께 만족을 드리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의를 제공(전가)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또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였고, (처음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한 고유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칼빈, 로마서 5장 19절 주석).

 

    다음은 ‘{칼빈주석: 로마서}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3)’에서 옮기는 <로마서 5장 19절 주석> 전문全文이다. 확증편향 환자가 옮긴 부분은 배경색을 칠한다. 한 문단으로 돼 있는 주석인데, 가독성을 위해 내가 문단을 나눈다.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것은 앞에 나온 내용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 절에 대한 꼭 필요한 보충설명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도는 우리 자신은 무죄한데 단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인이 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미 앞에서 우리가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도 자기가 무죄하다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여기에서 각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됐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흡족하시게 해드림으로써 우리를 위한 의를 확보하신 것임을 알게 된다. 이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의의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한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사도는 이 의를 “순종하심”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의가 어떤 종류의 의인지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자 한다면 율법 일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의인이 넘어지면, 그에게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의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달랠 수 있는 방법들을 스스로 고안해 내서 막무가내로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기를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들을 따르고 그분 말씀에 순종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까닭에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행위의 의가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도 더럽고 추악한 것들인 그런 행위들을 스스로 고안해 내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뽐내는 자들이 얼마나 정신 나간 자들인지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기 때문이다.

 

    위 주석에서 “우리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때만 존재할 수 있는 까닭에”는 {기독교 강요 제3권} [14장] <13항>에 적힌 칼빈 선생님 가르침 “하늘에서는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의義 외에는 허용하지 않는다.”를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사도는 이 의를 ‘순종하심’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의가 어떤 종류의 의인지를 보여준다.”는 주석은 “그리스도 본질(신성神性)의 의, 그 의의 전가”를 주장한 루터교 오시안더 목사를 반대해 {기독교 강요 제3권} [11장] <9항>에서 “칭의는 그리스도 인성의 사역임”을 강조하셨던 칼빈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첫 아담의 불순종’과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간 중보자 그리스도의 순종’을 증언한 로마서 5장 19절이 ‘그리스도 본질의 의’를 다룬 구절이 아니거니와, 칼빈 선생님께서 <로마서 5장 19절 주석>에서 강조하신 그리스도의 의는 “아울러, 사도는 이 의를 ‘순종하심’이라고 부름으로써 이 의가 어떤 종류의 의인지를 보여준다.”에서 보는 대로 “행위의 의”다. 물론, 그 “행위의 의”는 “율법 일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순종”하신 의(갈 3:13, 5:3. 약 2:10)다.

 

    이토록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양심에 화인 맞아 ‘칼빈 <로마서 5장 19절 주석>’을 왜곡해 거짓 증거를 일삼은 범죄를 저지른 철면피는 [칼빈주의 수호해야 합니다.]에서 “제가 저들이 주로 왜곡하여 이용해 먹는 칼빈의 말들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하는 두번째 글로 ‘칼빈 <고린도전서 1장 30절 주석>’을 옮긴다. 맞춤법이 틀린 “받아드려진다”, “받아드려짐”은 내가 고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셨고 또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의로워졌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는 죄의 용서와 하나님에게로 받아들여짐으로 구성되는데,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습니다.” (칼빈, 고전 1장 30절 주석)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하신 십자가 사역에 따른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순종”에 따른 “하나님에게로 받아들여짐”’이라는 이중 은혜를 말씀하신 이 주석에 관한 예장 합동 꼴뚜기 해석, “칼빈이 말하는 순종은 율법 조항들에 대한 순종이라기보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라는 아버지의 모든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결코 모든 율법 조항을 지켜서 얻으신 율법의 의가 전가되는 능동 순종 교리의 근거가 아닙니다.”는 해석은 ‘칼빈 <로마서 5장 19절 주석>’과 칼빈 선생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두 가지 의義(이중 은혜)’를 구별해 다루신 주석, ‘칼빈 <고린도전서 15장 4절 주석>’4)과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13항>, [17장] <5항>’5)에 비춰, 단번에 무너지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깊이 다루지 않는다. 다만,

 

    ‘예장 합동 꼴뚜기가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그리스도 본질의 의를 증거하는 본문으로 삼았음’을 알고 있는 나는 나 말고6) ‘누가 칼빈 <고린도전서 1장 30절 주석>을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증거하는 본문으로 삼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그리스도 능동 순종을 증언하는 구절’로 삼은 사람을 알고 있다. 바로 나7)다.

 

    [칼빈주의 수호해야 합니다.]에서 왜곡의 명수는 “율법이 자기에게 복종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며 “율법”를 강조함으로써 마귀의 종자로서 간교함을 드러낸다. 참으로 간교한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율법이 자기에게 복종한 그리스도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율법이 율법을 준수하신 그리스도를 의롭게 만들어 그리스도에게 영생(부활의 영화로운 몸)을 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면, 살리라. 영생을 얻으리라.”는 행위(생명)언약을 말씀하셨기에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율법을 흠 하나 없이 철저하게 지키신 그리스도를 “의롭다.” 하시며 그 의에 따른 영생을 수여하신 것이다.

 

    아무튼, ‘그리스도 흠 없는 생애와 십자가는 결코 분리할 수 없음’과 같이,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은 결코 분리할 수 없음’과 같이 율법은 ‘여호와의 율법’이다. 그러함에도 신학이 짧은 예장 합동 꼴뚜기 Wolf이철은 오늘도 ‘여호와’와 ‘율법’을 분리해 율법을 폄하貶下함으로써 율법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욕보이는 짓을 마다하지 않았다. 구약 시대 같으면, 돌로 쳐 죽여야 할 마땅한 신성모독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한심한 놈이다.

 

    ‘이단 구원파 구원론을 비평하신 예장 합신 박영돈 교수님’을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이단시할 때, 신대원에서 공부하지 않은 평신도인 내가 휘두른 칼(반론)에 방어(반론)다운 방어 한 번 못한 채 자신의 짧은 신학이 털려 {페북}에서 나를 차단까지 할 정도였으면, 자신의 짧은 신학을 돌이켜보며 자기 주제를 파악해 보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그런데 예장 합동 꼴뚜기 돈키호테에게 이런 겸손은 찾아볼 수 없고, “검사보다 더 좋은 촉을 가진 형사의 촉”을 가진 교만한, 이 한심한 벽창호가 그 촉으로 고작 하는 짓이 “고신 총회는 능동 순종 신봉하는 교수들 파면하라.”다.

 

    “베자야! 베자야! 대체 칼빈에게서 무엇을 배웠느냐? 한심한 놈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 불세출(?)의 듣보잡에게 자기 주제를 파악하는 날이 올까? 그래서 자기 짧은 신학과 성경 지식을 깨달은 듣보잡이 막말을 일삼은, 시궁창보다 더러운 자기 입 주둥아리를 자기 두 손으로 바느질해 꿰매는 일이 올까?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한심한 잡것이 예장 합신 김병훈 교수님을 두고 했던 망발8)을 이 시궁창보다 더러운 입을 가진 불후의 듣보잡 벽창호에게 되돌려 주며 이 글을 마친다.

    정이철은 목사도 신자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이고 본질이 틀려먹은 사람입니다.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병자입니다. 죽어도 못 고칩니다. 마귀의 자식이에요. 두고 보세요. 무덤까지 가져갈 겁니다. 제 버릇 개 못 줍니다. 영향력도 없는 사람이고,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됩니다. 하려면 하라고 내버려 놓으면 지가 알아서 하겠지요.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할 거예요.

 

    PS: 지금까지 예장 합동 노회들 가운데 ‘시궁창보다도 더러운, 저 입 주둥아리를 꿰매려고 나선 노회가 없다는 점에서 Wolf이철이 예장 합동에서 “영향력도 없는 사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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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음 글을 참고하라.

 

<칼빈 선생님께 ‘그리스도께서 능동 순종으로 얻으신 공효’ 개념이 없으셨을까?>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67

 

    2) 개그맨들은 높은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데 지능이 낮은 예장 합동 꼴뚜기는 병신 육갑 짓으로 나를 웃프게 한다는 점에서 이는 개그맨들을 모독하는 글이다.

 

    3) Wolf이철이 ‘신대원 교수들을 검사’로, ‘신대원 교수가 아닌 목사인 자신을 형사’로 낮추는 겸손(?)으로 {유튜브} 동영상에서 한 말이다.

 

    4) 다음 글을 참고하라.

 

<십자가와 부활에서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두 가지 의義(이중 은혜)를 ‘구별’하신 존 칼빈 선생님>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14

 

    5) 위 ‘각주 1)’를 참고하라.

 

    6) 다음 글을 참고하라.

 

<Wolf이철 말을 빌려 말하자면, 서철원 신학은 “칼 바르트 신학과 유사한 신학”임>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12

   

    7) 다음 글들을 참고하라.

 

<마지막 아담으로서 자신의 영생(칭의)을 위해서도 율법준수를 하신 그리스도, 그분의 경건>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143

 

<박형룡 목사님이 “이단”이면, 존 머레이 목사님도 이단이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219

 

     다음은 위 링크 글에서 옮긴다.

    “처음부터”??? ㅉㅉㅉ!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적힌 그리스도의 “의로움”, 그 의義가 ㅡ칼빈 선생님께서는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가 받는 의義는 그리스도 인성人性의 사역으로 이루신 의義다.”고 하셨는데, “인간人間이신 중보자”(딤전 2:5), 마지막 아담(人間) 그리스도께서 전全 지상 생애에서 이루신 것이 아닌ㅡ Wolf이철 해석대로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께서 “처음부터” 가지신 의義, ‘그리스도 본질의 의(신성神性의 의義)’를 뜻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성인成人으로 장성할 필요가 없으셨다. 장성해 십자가에 달릴 필요도 없으셨다. 즉, ‘그리스도 자발(능동) 순종의 극치인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은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즉 태어나시자마자 죽임을 당하면 되셨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헤롯 왕 유아학살’ 때 ‘피동(수동)’으로 죽임을 당하면 되셨기 때문이다.

 

    8) {바른 믿음} 정이철 <제정신 갖고 사는 목사들이라면 이 사람 글을 보면서 미친 사람 취급할 거예요.>

https://archive.ph/1mL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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