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이 글 역시 도돌이표 비평문이나 마찬가지다. 다음은 ‘정이철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에 서철원 목사님이 쓰신 <추천사>에서 옮기는 글이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율법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지혜의 보고寶庫임에도, “{성경}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하셨지만 반율법주의 색채가 진한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능동적 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사람들로 영생을 얻도록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룩하셨다는 것입니다. 피 흘리심으로 죄 용서를 이룬 것이 의라는 신약의 가르침을 완전히 무시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신약 성경에 없습니다. 개혁신학의 아버지인 칼빈의 가르침에 아무런 자취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 전통이 17세기에 시작되었고 전통을 중시해야 한다면서 성경 위에 두었습니다. 한국의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이 전혀 가르치지 않은 생소한 가르침을 진리로 주창합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를 구원의 필수요건으로 주창합니다. 그것을 성경의 가르침 위에 두고 하나님의 지혜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깁니다.
다음은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43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얻으신 율법의 의로 자기 백성에게 칭의를 주었다는 이론을 부정하는 칼빈과 서철원 박사도 동일하게 그리스도가 순종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한다.
다음은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108쪽~109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능동적 순종 교리에 세뇌되어있는 교수들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다른 저술들을 정직한 눈으로 찬찬히 다시 읽어야 한다. 칼빈의 신학을 왜곡시키지 말고 정직하게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율법을 준수하여 얻으신 율법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를 의롭게 만들었다는 이론과 칼빈의 신학과 무관하다. 이 교리를 주장하는 많은 학자가 칼빈이 비록 자신들과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지라도 자신들과 같이 율법주의 신학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의 그런 말들은 칼빈에 대한 범죄이고 심각한 명예훼손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율법의 의를 얻어서 우리에게 전가했다고 가르치지 않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신비하게 연합되었다고 강조했다.
…(중략)…
능동적 순종 교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더 이상 칼빈에 대한 명예훼손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본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진다는 것이 칼빈의 칭의 신학이다.
{바른 믿음} {독자 마당} 시골 청년 <칼빈이 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아야 예의 2>
전종득 목사님이 {바른 믿음} 글들을 아카이브 링크해 모아서 대략 2 년 전에 나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글들 속에 있는 위 링크 글을 지난 토요일에야 읽었다. 위 링크 글을 클릭하면, ‘시골 청년’ 님이 “칼빈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셨고, 그것이 믿는 우리에게 의가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말하고 있다. 칼빈의 에스겔 18장 17절 주석 내용이다.”며 옮기신 주석, ‘존 칼빈 <에스겔 18장 17절 주석>’이 적혀 있다. 그리고 본문 아래에 {바른 믿음} {독자 마당}에 올라온 글 제목들과 글쓴이 별명들이 나온다. ‘늘 푸른 솔’은 나다.
내가 올렸던 글 다섯 편1)에서 하나가 ‘<칼빈 선생님께 이른바 “능동 순종”으로 얻으신 ‘그리스도 의(공효) 개념이 없으셨을까?>(2019.03.16)’다. 이 글은 2019년 3월 16일 22시 20분에 {페북} 내 담벼락에 먼저 올렸던 글이다. 그리고 {페북} 내 담벼락 글을 3월 19일 21시 12분에 {개혁신앙 푸르내}에 옮겼다. {개혁신앙 푸르내}에 옮겼던 글을 링크한다.
<칼빈 선생님께 ‘그리스도께서 능동 순종으로 얻으신 공효’ 개념이 없으셨을까?>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67
신학과 독해력이 짧은 Wolf이철은 ‘그리스도의 모든 순종’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성 삼위 성부 하나님의 뜻에 모두 순종하심’으로 해석한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심’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어기면 죽으리라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심’으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위 링크 글에 옮긴 ‘{기독교 강요 제2권} [12장] <3항>’과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5항>’은 제쳐두자. 그러면 위 링크 글에서 남는 칼빈 선생님 가르침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13항>’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13항> “그러함에도, 우리는 그리스도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 산 소망이 있’(벧전 1:3)다. 그분께서 다시 사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자로 나타나심과 같이, 우리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분 부활에 있다.”의 해석으로서 {기독교 강요 제2권} [17장] <5항>’이다. 물론, ‘{기독교 강요 제2권} [17장] <5항>’은 설명이 필요 없는 글이다. 즉, 칼빈 선생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와 그 의의 전가 교리’를 명명백백하게 가르치신 글이다. 즉, “똑똑히” 가르치신 글이다.
그런데 내가 {바른 믿음} {독자 마당}에 글들을 올렸을지라도 ‘시골 청년’ 님 글들을 클릭해 읽지는 못했다.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Wolf이철 역시 무척 바쁜 나머지 내 글들과 시골 청년 님이 옮기신 ‘존 칼빈 <에스겔 18장 17절 주석>’을 읽지 않았거나 수박 겉핥기로 읽었다고 치자. 그러나 논쟁의 대상자 노승수 목사님 반론 글들은 수박 겉핥기가 아니라 정독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게 신사의 자세(행 17:11)가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사소한 문제도 아니고 한 목회자의 목회 생명과 얽힌 ‘이단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심각한 문제, 진리를 다투는 무척 심각한 문제 앞에서 “정직한 눈으로 찬찬히” 노승수 목사님 반론 글들을 읽는 자세가, “평균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야비한 인격이 아닌, 평균 이상의 인간 상태에 이른 성인군자의 인격을 보여주는 자세가 아니겠는가?
아래 링크 글은 11월 12일 토요일 저녁 무렵에 전종득 목사님이 카톡으로 링크해 주신 글이다. “Wolf이철이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에서 노승수 목사님과 관련해 사기성 짙은 글, 사실관계를 왜곡해 또 노승수 목사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을 썼는데, 이와 관련된 자료가 없습니까?” 하는 내 부탁으로 주신 글이다.
{울림} 노승수 [{바른 믿음} 정이철 목사의 글에 대한 반론 (2)] (2019.02.13)
http://www.woolrimstory.net/news/articleViewAmp.html?idxno=429
{기독교 강요 제2권}[17장]<5항>에서 두 번 “…”을 써서 중략하신 부분이 있어서 아쉽지만, 다음은 위 링크 글에서 옮기는 글이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의 한 대목을 더 소개합니다. 2권 17장 5절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전반부는 수동적 순종을 후반부는 능동적 순종을 설명하는데 성경의 근거들을 들어서 충분히 잘 알아듣기 쉽게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를 죽음의 형벌에서 구속하셨음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에 대하여 율법에서 약속하신 바를 ㅡ‘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레 18:5) ㅡ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얻는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우리가 지불할 수 없는 것을 친히 지불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얻으시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계신 목적이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 의의 전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 것이다(롬 4장).”
박채동은 1981년 개혁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대학원)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에 속한 교회에 성도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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