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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재성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15)

by 깨우는자동훈 2022. 8. 20.

능동적 순종은 온 생애 동안 율법 전체에 대한 순종이다

 

사람으로 몸을 입으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가 순종의 과정에서 보여준 성육신의 삶에서 놀라운 감격과 은혜를 발견하였다.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무한한 권능을 가진 분이지만,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시기 위해 정작 사람의 몸을 입으셨다. 성자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은 단순히 성육신으로만 좁게 해석하지 않았다. 비하의 신분에 계시는 동안에는 신적인 전능하심을 완전히 다 발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특권과 지위와 권능을 포기하고, 곧 하나님의 본체가 누리는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보통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전능하신 창조주이자 만물의 주권자요 통치자가 우리를 위해서 똑같은 사람이 되셨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기에, 율법에 복종해야만 하고,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복음서에 서술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그대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신성을 가진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은 엄청난 어려움을 몰고 왔다. 육체를 가졌기에 율법을 지켜나가야 할 대상이 되었고, 죽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의 외모와 지위와 출생배경 때문에, 그 누구도 나사렛 예수를 믿음의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갖는 함축적인 의미는 유일하신 중보자로서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삼중직의 사역을 완성하는 것이다. 중보자의 사역을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성자 하나님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결정적으로 거룩하심과 권능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종의 형체를 입으심

그리스도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주시는 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종이 주인을 받들고 높여 주듯이,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셨다. 원래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으로서 모든 만물의 주인이요, 통치자가 되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군왕들처럼 호령하고, 압박하며, 군림하는 나라를 세우지 아니하셨다. 도리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아름다운 종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은 신분상 자발적인 비하를 의미한다. 종이라는 용어는 로마 제국 시대의 수직관계라는 사회적인 상황이 반영되어지는 단어이다. 종이 되었다는 것은 지위의 박탈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종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계속되어지는 수치를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의 종은 주인의 소유물로서 살아가다가 해방될 때까지는 전혀 자유함을 누릴 수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 사이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야만 할 인간다운 지위와 대우를 상실한 종으로 오셨다. 그분에게 인간적인 특권이나 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의 종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엄청나게 큰 인내와 사랑이 필요한 행동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평범한 종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비천한 자들을 대신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대신 지불하기까지 처절함을 심화시켰다. 그분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욕과 형벌을 당하기까지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았다. 십자가의 처형 이후에는 가장 처절하게 음부에까지 던져져서, 모든 인간의 처절한 고난을 다 맛보았다.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불순종의 영이었다.

 

자기를 낮추심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를 낮추시고 가난하게 되셨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겸손함을 제시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주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당하면서도, 또한 형편없이 가난한 인간의 삶으로 찾아오셔서 인류의 고통에 참여하셨다. 성육신의 전 과정은 인류를 품으시되, 소외된 곳에서 살아가는 외로운 사람들가지도 모두 포용하시는 사건들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을 닮아서 자신의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바울 사도의 겸손은 사역의 동기이자, 목적이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자신들의 부족한 면을 깨닫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간다.

 

여기서 사용된 겸손이라는 헬라어 타페이노스는 겸손보다는, 수치 혹은 굴욕의 의미가 더욱 강하다. 일반적으로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고, 오만이다. 로마 제국에서나 헬라 문화에서는 타페이노스를 단순히 겸손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표현이 이사야 538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겸손한 용기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23:11-12).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낮추는 데에 필요한 것은 겸손한 용기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탄생하심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첫 사람 아담의 실패 뒤에 오신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사람으로, 우리와 같은 인간 본성을 가졌음을 확인하였다. 첫 사람 아담과 대조되는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의 특징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일관했다는 점이다. 첫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이 성취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자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였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 대항하여, 순종하는 사람이 견뎌내야 할 인내와 신의를 배반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전히 순종하였다. (계속)

 

김재성 교수

김재성 박사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개혁주의 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칼빈의 신학사상과 정통개혁신학의

흐름과 주제들과 주요 신학자들을 추적하여 소개하는데 앞장서 왔다.

현재는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명예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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