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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정성우

준비 교리에 대한 올바른 주장 (5)

by 바른신앙지기 2022. 1. 7.

이제 스코트랜드 장로파인 사무엘 루터포드와 윌리엄 거스리를 통하여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는 청교도 회중주의 자들만이 준비 교리 즉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말한다며 그들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거스리는 “율법의 예비 작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령께서 어떻게 율법을 가지고 죄인들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시는지에 대하여 “참된 구원의 확신 제 2장”에서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청교도 회중파만아 이러한 율법의 기능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율법의 기능을 통하여 성령께서 어떻게 죄인들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시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고 청중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외침이 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스코틀랜드 장로파들도 분명히 율법의 기능 즉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에 대하여 외쳤음을 아래 글을 통하여 밝히는 바이다.

사무엘 루터포드는 자신의 요리문답 제 23, 24장 구속의 적용되는 길과 회개에 관하여에서

“문 280: 그렇다면 하나님의 효력적 부름 전에는 아무런 준비할 게 없습니까?
답: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무서움으로 내치시며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보게 하십니다(행 9:6; 2:37).

문 285: 돌 같은 마음이 어떻게 제거됩니까?
답: 그리스도의 죽음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도말하시며, 그리스도를 죽인 우리들의 죄를 몹시 슬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우리의 죄를 미워하며 질색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슬픔과 사랑이 죄의 몸을 못 박히게 하는 못이 되게 하심으로 제거하십니다(롬 6:6; 갈 5:24; 롬 6:4; 8:13; 요일 4:11; 고후 5:14).

문 288: 회개란 무엇입니까?
답: 우리 안에서 성령이 이끄시는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입니다. 그리고 악한 길을 버리는 것이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문 289: 우리 안에서 회개를 하나님이 어떻게 일으키십니까?
답: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율법을 가지고 우리가 정죄 받아야 할 자임을 알게 하시고,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아가 자비를 구하게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루터포드는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자신이 만든 요리문답을 통하여 율법으로 인한 죄의 비참함에 대한 애통과 슬픔에 대하여 충분히 말하고 있다. 즉 “율법의 무서움으로 내치시며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보게 하십니다..... 율법은 우리가 정죄 받아야 할 자임을 알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루터포드의 책 (see pp. 275-301 of Christ Dying and Drawing Sinners to Himself, 1803 edition). 중에 pg 297에서는 “준비 교리는 죄인들을 정죄하여 그들을 굴복시키는 것이며, 그들의 도덕적 행동으로 공로를 얻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돌이켜 거듭나게 하는 조건도 아니다. 하지만 죄로부터 돌이켜 거듭나게 할 수 있도록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함으로서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에 대하여 올바르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는 율법의 기능으로써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정죄를 받아 자신에게는 어떠한 소망이 없음을 알게 하며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소망 없음을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인도하는 원리가 율법의 기능 또는 준비 교리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성령께서는 우리를 준비 시키시는 도구가 율법임을 항상 말해왔다.

윌리엄 거스리는 “참된 구원의 확신-the Christian’s Great Interest”이란 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시는 다양한 방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율법의 작용(기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율법의 예비 작업에 대해 , 즉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 고유의 길을 예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통상 사용하시는 작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율법의 이 작용도 하나의 표지로서 비중 있는 역할을 합니다. 이 작용을 일컬어 율법의 사역, 혹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사역이라고 합니다. 이는 "종의 영" 과 관계있으며, 이제 신약 성경에서는 이 종의 영에 항변하여 대개는 "양자의 영" 으로 안내합니다(롬 8:15)..... 이 같은 어떤 예비 작용을 통해 사람을 효과적으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처럼 대하신 사람들에게 율법의 이 작용은 이들을 더 강하게 하고 확실하게 하여 이후에 따를 다른 표지들을 더 중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예비 역사는 종의 영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곧 있을 은혜의 역사를 확실하게 지적해 준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기를 북돋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이 예비 역사가 있는데 은혜의 역사가 뒤따르지 않는 경우는 보기 드뭅니다..... 그런 예비 역사를 활용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방법이나 수단만 고수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거스리는 율법의 작용에 대하여 죄인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한다.

“4.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네 번째이자 가장 통상적인 방식은 명료하고도 분별 가능한 율법의 역사, 곧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방법입니다. 앞에서 암시했다시피 우리는 흔히 이를 가리켜 "종의 영" 이라고 합니다. 이는 죄와,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양심이 각성된 사람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와 진실로 가까워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인이나 사울, 유다 등의 경우를 보면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인 걸로 보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구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죄를 깨우치고 양심이 각성되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역사가 일어났을 때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거나 그 역사가 실패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고, "양자의 영" 과 성령의 은혜의 사역으로 귀착되는 게 보통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죄인을 이런 방식으로 대하시는데, 율법의 이 역사로 판단(심판)을 내리시는 것에 대해 크게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이 많으므로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율법의 이 역사는 비교적 거칠고 갑작스럽게 진행되거나, 혹은 긴 시간 동안 차분하고 느긋하게 오래 끌며 진행되며, 그래서 진행 과정을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간수와 바울, 다른 몇몇 회심자들의 경우 이 역사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순간에 갑자기 이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치셨고, 불과 검을 지니신 듯 이들에게 임하사 무시무시하게 이들을 포로 상태로 만드십니다. 대단한 율법적 각성이 사실은 기만이어서 아무 결과도 낳지 못하거나 더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이 회심자들에게서 눈에 띄는 사실 몇 가지만 지적하여 이들에게 일어난 율법의 역사가 은혜로운 결과를 낳았다는 점을 입증해 보겠습니다. (1) 진리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떤 사람의 영혼에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그 사람을 무서워 떨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행 2:37), "무서워 떨며"(행 16:29). 이런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명민함을 잃고 맙니다. "나에게 무엇을 시키시려나이까?"(행 9:6, 개역개정판에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음-옮긴이) 바울은 이렇게 물었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간수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2) "내가 무엇을 할까요?" 라는 질문에 함축되었다시피, 그 사람은 조건이 무엇이든 구원과 하나님과의 친교에 만족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혜사가…와서 죄에 대하여…책망하시리라…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7-9)라는 말씀을 이 경우에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특히 불신앙을 깨닫습니다. 이제 자기와 경건한 사람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불필요하고 교만하고 악의적인 엄밀함 면에서만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제 자기가 기만에 빠져 있다는 것을, 넓은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패망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이 참담한 광경 가운데 자신이 죄짐에 눌려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그리스도께서 대신 져주셨다고 생각했던 그 죄짐을 여전히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시 50:16)와 같은 말씀 때문에 이제 이 사람은 약속 앞에서 놀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이 사람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깊이 신경 쓰게 되고, 이것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알아 마음에 새기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16장의 간수처럼 이런 궁금증을 품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구원은 그의 삶을 주도하는 하나의 문제가 됩니다. 전에는 구원 같은 건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살았지만, 이제는 구원 문제가 생각을 지배하고 다른 일들은 거의 중시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이 멸망 직전인데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마 16:26)하겠습니까?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이 당혹스러워합니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그 작정을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이 문제가 결말지어지기 전에 불시에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요. 어떤 이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지었다는 불안감에 초조 해하기도 하는데, 이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라 그 불안감이 아주 위험한 수준에 이르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탄은 비참하게 자기 생에 종지부를 찍은 수많은 사람의 서글픈 사례를 들이대며 이들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히 2:18)는 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이 낙심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주님께서 그 일을 막으시는 자비의 역사를 행하사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 사람을 지탱하십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구원의 가능성을 확신시키시고, 값 없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많은 증거들을 떠올리게 하시며, 잔학한 우상숭배자요 마귀와도 교통했던 므낫세가 그럼에도 자비를 얻었던 것처럼(대하 33장) 그 사람의 중대한 죄과를 용서하시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께 순복하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은혜와 은총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성경 말씀은 이 밖에도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다시 이런 질문에 이릅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이 질문은 구원의 가능성을 깨닫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 밖의 다른 뜻으로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는 말씀이나 이와 비슷한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이제 그 무엇도 자신을 이 자비에서 배제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에게 그 자비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말입니다. 자신을 지탱시키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나중에 이 사람은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시 94:18). 그리고 나중에 또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2-23).... 이렇게 구원받을 가능성을 발견한 뒤 그 사람의 영혼에는 소원의 역사가 활성화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물음에 이 사실이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이 소원이 방향을 잘못 잡아 이렇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요 6:28). 이 경우, 전에 자기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로 갈피를 잡지 못했던 사람은 스스로 그 난국에서 빠져나오려고 자기 나름대로 애를 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자기에게 명령된 모든 일을 다 하고 모든 악한 길을 다 버리기로 결단하며(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크게 오해하며),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서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롬 10:3)기 시작하고, 이에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드러내사 확실히 구원의 기회가 생길 수 있도록 하시려는 생각으로 다시 그 사람을 맹렬히 공격하십니다. 백성들이 너무 당돌한 약속을 하는 것을 보고 여호수아가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수24:19)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 보다 더 많은 내용들이 참된 구원의 확신이란 책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더 확실히 읽고 싶다면 “참된 구원의 확신 제 2장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가시는 다양한 방법”을 찾아 읽기를 바란다.

앞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도르트 신조 그리고 벨직 신앙고백과 스코트랜드 장로파인 사무엘 루터포드와 윌리엄 거스리의 주장에 대하여 지금껏 살펴봤다. 이제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한국 교회가 율법의 올바른 기능에 대하여 깨닫고 교회 안에서 선포할 것인가이다. 많은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한국의 신앙 문제에 대하여 “칭의와 성화”의 초점을 두고 풀어가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율법의 기능에서 참된 회심으로 나오는 것이 지금 현재 한국 교회 신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떤 목회자 분들은 율법의 기능을 잘못 적용하여 교회에 많은 불이익을 당하신 분들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우선 율법의 기능을 교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모든 목회자분들이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잘 깨닫고, 율법만 외치는 것도 아니며 죄에 대하여 외치는 것만도 아닌, 하나님에 대하여 잘 가르치고 설명하는 가운데 성도들이 자신의 죄를 반사적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올바른 가르침이 있다면 성도들은 균형 있는 신앙 즉 죄에 대하여 슬퍼하며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주님께 나아가 겸손히 엎드리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고자 할 것이다. 준비 교리에 대하여 더 이상 문제를 삼지 말고 어떻게 하면 율법의 기능을 통하여 한국 교회가 건전한 신앙 가운데 진정으로 성도들이 더욱 성숙하며, 겸손하며 주님만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인도할 지를 목회자들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성우 목사

정성우 목사는 Jericho College and Seminary를 졸업하고,

칼빈과 청교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는 인천 청라지역에서 개혁주의 교리에 입각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안에 하나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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