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와 대요리 문답을 통해서 율법의 기능이 어떻게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과 일치하는지에 대하여 설명 할 것이다.
우선 앞에서 기독교 강요와 하이델베르크를 통하여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말했듯이 이 부분을 잘 숙지하고 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본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 대요리 문답에서 말하는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살펴보자.
“95문: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도덕의 법칙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답: 도덕의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뜻, 그들로 준행하도록 얽매는 그들의 본분에 관하여 알려주고, 그들이 그것을 지킬 수 없고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이 죄악으로 오염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그들이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느껴서 겸손하게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한 순종이 필요함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게 돕는 용도가 있습니다.
96문: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덕의 법칙의 특별한 용도가 무엇입니까?
답: 도덕의 법칙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양심을 일깨워 다가오는 진노에서 피하게 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며, 만일 그들이 죄의 상태와 죄의 길을 고집할 때에 그들로 핑계할 수 없게 하고, 저주 아래 있게 하는 용도가 있습니다.
153문: 우리가 율법을 위반한 까닭에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우리가 율법을 위반한 까닭에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회개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께서 중보 사역의 유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쓰시는 외적인 방도를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입니다.
위에 부분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율법의 기능을 불신자들에게 우선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즉 95문답에서는 “그들이 그것을 지킬 수 없고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삶이 죄악으로 오염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그들이 자기의 죄와 비참함을 느껴서 겸손하게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그분의 완전한 순종이 필요함을 더욱 분명히 볼 수 있게 돕는 용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부분이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는 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각성을 시키며 겸손케 만들어 가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어떻게 말씀(율법)을 통하여 죄악된 인간들에게 조명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가를 율법의 기능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과 우르시스누스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대요리 문답에서도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에 대하여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이 있은 후에 유효적 역사가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 웨스트신앙고백서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살펴보자.
웨스터민스터 19장 6항 하나님의 율법
6. 참 신자들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거나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불신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참 신자들에게도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이 아주 유용한 것은 그것이 생활의 법칙으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 알려 줌으로써, 그들을 지도하고 강제하여 그것에 따라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생활이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는 것을 발견케 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들을 살핌으로써,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고, 죄를 인하여 겸비하게 하고, 죄를 증오하기에 이르게 하며,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순종이 자기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해 주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생한 자에게도 그들의 부패를 억제하는 데 행위언약으로서의 율법이 유용함은, 그것이 죄를 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율법의 경고들은, 비록 중생한 자들이 율법에 경고되어 있는 저주로부터는 해방되어 있지만, 그들이 지은 죄들로 인하여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이생에서 어떠한 고통들을 기대해야 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율법의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또 율법을 성취하는 때 그들에게 어떠한 축복을 주시는가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축복들은 행위 언약으로서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지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선을 행하고 악을 삼가는 것은, 율법이 선을 권하고, 악을 그만두게 하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가 율법 아래 있고, 은혜 아래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7. 앞서 언급한 율법의 용도는 복음의 은혜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조화된다. 그리스도의 영은 인간의 의지를 억제하고 율법 안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일을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행할 수 있게 해 준다.
제 6항에서는 불신자들과 신자들에게 율법의 용도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이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1용도와 2용도에서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칼빈의 율법의 용도 중에서 제 1용도는 불신자들에게 제 2용도는 불신자들과 신자들에게 그리고 제 3용도는 신자들에게 율법의 용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준비 교리에 대한 올바른 주장 1.”를 통해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효적 역사는 언제 나타나는가? 유효적 역사는 율법의 기능을 통하여 죄를 자각하는 자들과 각성이 되어 겸비해진 자들에게 나타난다. 이 부분을 칼빈이 율법의 제 2용도에서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10. 율법의 두번째 기능은, 적어도 형벌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켜, 율법의 절박한 위협을 듣지 않는다면 공정하고 옳은 것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억제된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감동받거나 충동받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자면 재갈을 물린 것처럼 그들의 손이 외부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또 억제되지 않는 한 제멋대로 날 뛸 수밖에 없는 부패를 내부에만 얽매어 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선하지도 않고 또 의롭지도 않다. 그들은 공포나 수치에 의해 저지되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감히 실천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정욕의 횡포를 공공연하게 발산하지도 못하는 것이다.....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그들이 부름을 받기 전, 그리고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롬 1:4), 육신의 무기력 가운데 빠져 있는 동안은, 이러한 보호 감독 밑에 있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1. 율법이 몽학 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중 첫째 종류는 이미 언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덕이 있고 의롭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먼저 자신들을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율법은 그들을 꺾어 겸비케 하여 전에는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었다고 깨닫지도 못하던 것들을 추구하도록 그들을 준비하도록 해준다. ....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재갈이 필요하다. 즉, 그들이 의에 대한 모든 추구를 포기하게 할 정도로 날뛰는 육신의 정욕을 재갈로 억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는 때때로 정욕이 맹렬히 불타올라 육욕으로 향하는 영혼이 하나님에 대한 망각과 멸시로 빠져들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왕국의 기업을 상속시키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즉시 중생시키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공포 아래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신다(벧전 2:12). 이 공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정결하고 순수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그들에게 참 경건을 가르치기에 유익한 공포심을 말한다......즉 그들은 율법의 굴레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어떤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도록 얽매어 있다가, 마침내 성령에 의해 중생되어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2.7.10-11)
그렇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유효적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자.
“제10장 유효한 부르심
1.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롬8:30; 11:7; 엡1:10,11),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살2:13; 고후3:3,6),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롬8:2; 엡2:1-5; 딤후1:9,10).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행26:18; 고전2:10,12; 엡1:17,18),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겔36:26),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겔11:19; 빌2:13; 신30:6; 겔36:27),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엡1:9; 요6:44,45). 그렇지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신다(즉 강제적인 마음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오게 하신다).(아1:4; 시110:3; 요6:37; 롬 6:16-18)
2.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딤후1:9; 딛3:4,5; 엡2:4,5,8,9; 롬9:11). 그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고전2:14; 롬8:7; 엡2:5),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 또한 이 부르심 가운데서 제공되며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요6:37; 겔36:27; 요5:25)
4. 택함을 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은, 비록 그들이 말씀의 전도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으며(마22:14), 성령의 어떤 일반적인 역사들을 체험할지라도(마7:22; 13:20,21; 히6:4,5), 그들은 결코 그리스도에게로 참되게 나아오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구원 받을 수가 없다(요6:64-66; 8:24). 또한 기독교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그들이 본성의 빛과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계율에 따라서 그들의 생활을 열심히 꾸려나간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한다(행4:12; 요14:6; 엡2:12; 요4:22; 17:3).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단언하며 주장하는 것은 아주 유해하며 가증(可憎)된 일이다(요이9-11; 고전6:22; 갈1:6-8)
여기서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라는 말씀 속에서는 죄인을 유효적으로 부르심에 대하여 나온다. 즉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은혜와 구원의 상태로 부르심이 있다는 것이다. 유효적 역사에는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고 되어 있는데, 당연히 율법의 기능으로 인하여 죄의 각성이 있고 겸비한 자들에게 그 다음으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유효적 역사이다. 그러므로 유효적 역사와 율법의 기능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혼동하는 사람들은 율법의 기능이 유효적 역사 다음에 나오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율법의 기능은 성령께서 불신자들에게 시작하여 신자들에게도 역사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고 불신자들에게 역사하는 부분과 신자들에게 역사하는 부분이 다를 뿐이다. 이 부분에서는 칼빈의 율법의 3 용도에서 이미 밝힌 바이다. 즉 불신자들에게 역사되어지는 1 용도와 2용도 그리고 신자들에게 역사되어지는 2용도 부분과 3용도가 불신자와 신자들에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칼빈은 밝힌다.
다음에는 벨직 신앙고백서와 다른 스코트랜드의 장로파들이 준비 교리 또는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정성우 목사는 Jericho College and Seminary를 졸업하고,
칼빈과 청교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는 인천 청라지역에서 개혁주의 교리에 입각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안에 하나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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