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메니우스, 일치신조에 사용된 "능동적", "수동적" 의로움
그러면, 다시 한번 루터의 칭의론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지를 그 뿌리부터 살펴보자. 루터는 언어를 능숙하게 활용하여, 매우 정교하고도 상세하게 이 두 용어의 차이를 설명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차원이 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인간 본성을 규정하는 두 가지 관계성이 있다고 보았다. 첫번째 차원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성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들과 피조세계와의 관계성이다.
1518년에 루터는 “두 종류의 의로움"이라는 설교를 하였고, 그 다음 해에 출판하였다. 이 설교에서 루터는 처음으로 “능동적" 의로움과 "수동적" 의로움을 대조시켰다.
첫 번째 종류의 의로움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의로움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종류의 의로움을 수동적 의로움, 믿음의 의로움, 복음의 의로움, 외부적인 의로움,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이라고 불렀다. 이 첫 번째 의로움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루터는 주장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을 믿음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의로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수동적 의로움”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성도들이 갖는 칭의를 설명했다.
이 설교에서 루터는 "수동적 의로움이 외부에서 오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결혼 비유를 들었다.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그 두 사람은 모든 것들을 공유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결합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된다.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것이 된다." 루터 연구에 일생을 바친 로버트 콜버그 박사는 이것을 “정체성의 의로움”이라고 재해석 했는데, 왜냐하면 이 의로움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람의 정체성을 회복시키기 때문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시대와 그 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 국가와 사회에 우리가 짐작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루터의 두 가지 의로움이라는 개념은 그의 다른 저술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갈라디아 주석』 (1535), 『의지의 노예』(1525),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 멜랑히톤의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변호』(1530)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루터의 칭의론과 전가교리는 독일 내부에 세워진 루터파 교회 안에서만 활용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필자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연구하면서, 그 뿌리에 대한 추적을 계속해 오던 중에, 만일 루터의 성경해석과 설교와 신학 논문들이 없었으면, 칼빈의 신학적인 종합은 결코 세워질 수 없었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칼빈의 칭의론은 루터의 저서를 기초로 해서 "칭의와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개념으로 더욱더 완성되어 나갈 수 있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을 제시한 후로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구자로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시기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루터는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켜서 체계화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의 스승 스타우핏츠의 주선으로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1512년 10월 19일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다음 해에는 시편을 강해하고, 1515년 여름부터는 로마서를 가르쳤고, 1516년 9월부터는 갈라디아서를 강해했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가르치던 바로 그 무렵에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새롭게 인식하였다. 그는 성경을 통해서 두 가지 차원으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체계화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공로 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눈을 뜨면서, “능동적 의로움”과 “수동적 의로움”이라는 용어들로 대조하였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간추려 요약하자면, 루터가 초기 칭의론을 대학생들에게 강의하면서,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를 설명하고자 사용한 단어들이 “능동적 의”와 “수동적 의이다. 루터는 성경 해석학에서 탁월한 수사학적 대조와 표현들을 만들어냈는데, 또 다른 중요한 사례를 소개하면, 1518년 “하이델베르크 신학토론회”에서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대조시켰다. 이러한 신학 용어들은 물론 직접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은 아니다.
청년 루터가 가장 고민하던 주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대 스콜라주의 신학의 오류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칭의론을 성경에 입각하여 정립하면서 “능동적 의”라는 개념과 “수동적 의”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1519년 설교에서 처음 사용된 이 두 가지 개념을 통해서 채택된 개념을 루터는 공식화했다.
다시 1531년에 루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의로움이라는 개념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서, 자신의 신학과 연결시켰다. 하나는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 위로부터 오는 의로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위가 없어도 주시는 “단순한 수동적 의로움”이다. 루터는 여기에 우리의 행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단지 내려주시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루터는 다른 하나를 “능동적 의로움이라고 규정했는데, 도덕성이 개입하는 의로움으로서, 행위로 이웃을 사랑한다거나, 자기를 죽이는 의로움이다. 따라서 루터는 이 두 가지 의로움 중에서, 다음과 같이 "수동적 의로움”만을 강조한다.
나는 능동적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마땅히 가져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가졌으며, 실행에 옮겼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절대로 신뢰하지 않으며, 그것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설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능동적 의로움을 넘어서서, 내가 가진 모든 의로움이나 하나님의 율법에서 나오는 의로움을 벗어나서, 오직 수동적 의로움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은혜, 자비, 죄의 용서가 담긴 의로움이다.
이러한 루터의 칭의에 대한 개념과 대조는 그 이전의 중세 말기 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수사학적 대조법이자 새로운 구별법이었다. 곧, "하나님의 의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발견은 로마서 1장 16-17절의 주석에 나오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신학의 법칙을 견고하게 세우게 되었다. 이미 1515년에 로마서 강의를 하면서, 루터는 칭의가 인간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이 내부에서 공로와 선행으로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칭의를 성경적으로 명쾌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루터는 중세 말기의 선행과 공로주의를 강조하는 스콜라주의 신학 속에서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차원으로 접합을 시켜놓은 용접 부분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스콜라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율법을 사람이 스스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안목에서 의롭게 되어져가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한 구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란 단지 선행을 더욱 촉진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을 읽고서 이러한 스콜라주의 신학의 구조와 해석을 단호히 거부하게 되었다.
따라서,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는 루터의 칭의론을 통해서 영향을 받은 후대의 신학자들이 새로이 개념 규정을 내려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루터가 사용했던 능동적 칭의와 수동적 칭의는 다시 정교하게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재활용되었다. (계속)
김재성 박사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개혁주의 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칼빈의 신학사상과 정통개혁신학의
흐름과 주제들과 주요 신학자들을 추적하여 소개하는데 앞장서 왔다.
현재는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명예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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