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교리에 대한 올바른 주장 2.
이번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우르시스누스의 책을 통하여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어떤 목사들은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죄의 각성에서 고통가운데 신음하며 가난한 심령으로 가는 원리를 중생이후의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율법의 기능이 중생 이후에 역사하는 원리로 이야기하는 신학자는 제 2차 종교개혁을 통해 화란의 빌헬무스 아 브라켈이 이러한 주장을 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청교도의 견해을 잘못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깊이 논하기로 하자.
오늘은 우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하여 율법의 기능이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주장하는 율법의 3용도와 같으며 청교도들이 주장하는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와 같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다음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서에서 나온 내용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52 page 에 나와 있는 율법의 용도 115문에 대한 해설로써 953-956 page에 아래 내용을 담고 있다.
< 율법의용도 >
115문: 이 세상의 삶에서는 누구도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그 게명들을 그렇게도 엄격하게 선포하십니까?
답: 첫째로, 평생토록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더욱더 알고,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과 의를 더욱 진지하게 구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며, 둘째로, 이 상의 삶이 끝난 후 그 완전의 목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더욱 새롭게 되게끔 끊임없이 수고하고 또한 성령께서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도덕법(moral law)의 용도는 사람의 4중 상태에 따라서 달라진다.
I. 타락이전의 사람의 본성의 모습처럼,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지 않은 부패하지 않은 본성의 상태. 여기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용도가 주로 두 가지였다.
사람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완전하게 일치함. 타락 이전 사람은 율법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였고, 그리하여 마음의 성향과 행동 모두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였다.
선한 양심, 혹은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의식, 그리고 영생에 대한 확실한 소망 신적인 정의의 질서에 따라, 율법은 그 요구에 완전한 순종을 하는 지들에게 생명을 약속해 준다: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레 18:5).
II. 아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지 않은 부패한 본성의 상태 여기서도 율법의 용도가 두 가지이다.
교회와 세상에서 질서와 외형적인 규모를 보존함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에 율법을 새겨놓으셨고, 또한 사역자들과 통치지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말씀하셔서 중생하지 않은 자들까지도 억제하고 제어하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워지지 않은 자들 속에서도 생기는 건전한 이성의 판단에 반대되는 지독하고 노골적인 악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 15).
죄를 깨닫게 함. 율법이 중생하지 않은 모든 자들을 책망하고, 납득하게 하며, 정죄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며, 따라서 영원한 정죄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지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19, 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죄를 깨닫게 하고 또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게 하는 율법의 용도는 그 자체가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미움과 또한 죄를 더 많이 행하는 데에로 이어지며, 만일 그들이 유기된 자들일 경우는 그 것이 그들을 절망 가운데 빠뜨린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롬 7:8).
그러나 택한 지들의 경우는 죄를 깨닫는 것이 우발적으로 회심의 준비 단계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수단으로 하여 그들을 이끄시고 인도하셔서 그들의 불의를 깨닫게 하시고, 그들 자신에게 아무런 도울 수단이 없음에 대해 절망하게 하시고,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생명을 찾도록 하시는 것이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지들에게 주러 함이라” (갈 3:21,22).
III.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본성의 상태 중생한자들의 상태가 이에 해당 되는데, 여기서는 율법의 용도가 여러 가지다.
절제와 또한 율법에 대한 외형적인 순종의 보존 이미 앞에서 보았듯이 이 용도는 주로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된다. 그들도 죄를 삼가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의를 사량하기 때문이 아니라 형별과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그들은 형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죄를 미워하도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이 용도는 경건한 지들에게도 해당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연약함과 부패성 때문에 율법의 경고와 또한 그들 앞에 제시되는 형벌의 실례들이 그들에게도 필요하고 유용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임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부끄럽고 심각한 죄를 범할 때에 그들에게도 극심하게 벌하실 것을 경고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중한 일대로 행하 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려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겔 18:24).
죄를 깨닫게 함. 율법의 이러한 용도는 물론 주로 중생하지 못한 자들에게 해당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중생한 자들에게는 율법이 거울과도 같아서, 그 속에서 자기들 본성의 결정과 불완전함을 보게 되며,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낮아지게 되고, 그리하여 참된 회심과 믿음에서 계속해서 진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본성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더욱더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하게 되어, 하나님과 또한 그의 율법에 더욱더 화합하게 되는 것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된다”(갈 3:24)는 사도 바울의 선언은 우리가 방금 말한 이 율법의 두 가지 용도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율법의 이 두 가지 용도는 이미 중생한 자들에게는 물론, 아직 중생하지 않았으나 택함 받은 자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회심을 준비시키는 역할을 하며, 전자의 사람들에게는 회심을 더욱 굳게 하며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노골적인 심각한 과실들과 양심을 해치는 범죄들을 싫어하고 삼가지 않으면, 믿음이 불러일으켜지지도 않고 마음속에 남아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지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요일 3:7).
도덕법의 또 다른 용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겔 36:26). 율법이 회심 이전의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삶의 규범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중생한 자들의 경우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감사의 규범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교회에서 율법을 해설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가 어떤 분이신 가를 가르친다.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율법의 음성은 참된 교회가 무엇이며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확실한 증언이 된다. 율법이 그 순수한 상태로 전달되고 가르쳐지며 또한 올바로 깨달아지는 곳은 오직 교회밖에는 없다. 다른 모든 종교의 체계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패하여 있고, 율법과 더불어 분명한 오류들과 이단적인 사상들이 한데 뒤섞여 있는 것이다.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우리를 교훈해 준다. 혹은, 타락 이전에 아담에게 있었고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회복되는 그 원시의의 탁월함에 대한 하나의 증언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생을 증언해 준다. 이는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게 될, 장차 미래에 올 영생에 대해 증언해 주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준수하게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금생에서는 그것을 준수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게 되는 또 하나의 생이 남아 있는 것이다.
IV. 금생 이후 완전히 회복되고 영화된 본성의 상태에서도 율법의 용도가 있다. 그때에는 율법의 선포나 교회의 사역 전체가 종결되지만, 아직도 택한 자들에게는 율법을 아는 지식이 남아 있을 것이고, 율법의 모든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과 하나님과의 충만한 화합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타락 이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전히 변화하게 될 그 내생에서도 율법은 동일한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이다.”
위에 글을 읽어보면 칼빈의 율법의 3용도와 꼭 같음을 알 수 있다. 즉 중생전에 죄인들에게 율법의 기능이 시작하여 중생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성도들을 올바로 살아가도록 잡아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기능을 준비 교리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중생전에 율법의 기능은 죄의 각성을 통하여 겸비케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죄의 각성으로 가난한 심령이 있어야 회개가 뒤따라 온다. 물론 어느 정도 각성 했느냐에 대하여 청교도들은 성령님께 맡긴다. 준비 교리를 올바로 이해 하기 위해서는 분명 율법의 기능을 올바로 알아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오늘날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교회에서 무지하다보니 활용을 할 수도 없고 가르치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 하이델베르크에서 과연 이러한 율법을 교회에서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부분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우르시스누스) 956-961page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율법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가트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율법주의자들, 자유방임론자들, 또한 기타 유사한 속된 이단들이 제기하는 주요 반론들.
“......우리의 존재의 연약함 때문에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만으로는, 교회에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소용이 없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일이 유익할 뿐 아니라 심지어 필수적이기까지 한 다른 이유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한 실제로 그런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한가지 목적 혹은 용도가 사라진다고 해서 다른 목적이나 용도들까지 함께 사라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만일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그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할 이유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불완전함과 결함을 시인하게 되고 결국 우리 죄를 씻음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게 되며, 또한 우리 앞에 놓인 목표, 곧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르기를 더욱 진지하게 힘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금생에서 율법의 완전한 성취를 구하고 바랄 것을 명령하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 그것을 바라는 자들에게 마침내 그것을 이루시기를 목적하시기 때문이요, 여기서 우리가 참으로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바라면 금생 이후에 그것을 우리에게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땅에서 우리가 참된 경건에서 진보하게 하고자 하심이요,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들에 일치하게 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날마다 우리 속에서 더욱더 일깨워지고 확증되게 하고자 하심이다. 3. 율법을 이루고자 하는 이런 간절한 바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회개와 순종이 일어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율법 그 자체는 죽이는 조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이 그렇게 된 것은 사람의 과오 때문이다. 그들 자신과 율법의 차이를 선명하게 인식하면 할수록 그들의 구원에 대해 더욱더 절망가운데 빠지게 되고, 그리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이 없이 그저 율법만 있다면, 그 율법은 조문에 불과하다. 즉, 그저 가르치고, 순종을 요구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을 선언하는 그런 가르침에 불과하며, 그것이 요구하는 영적인 순종을 산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복음과 결합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이 시작되어 그것이 경건한 자들에게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중생한 자들은 기꺼이 즐겁게 율법에 순종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조문이다. 1. 복음이 없이 그 자체로 을 경우 2.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 대하여, 그러나 반면에 복음은 영이다. 즉, 복음이 우리 속에서 영적인 순종을 일으키시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직분이요 수단이라는 뜻이다. 물론 복음을 듣는 사람마다 모두 성령을 받고 중생하는 것은 아니나, 우리의 마음을 일깨워 율법에 순종하기를 시작하게 하는 믿음이 복음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더 이상 교회에서 가르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이 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우발적인 요인, 즉 사람의 부패함 때문인데, 그 일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1. 사람의 본성이 너무도 부패하였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스스로 알고 있는 바를 이행하지도 않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금하신다는 것을 아는 바를 오히려 열렬히 바라고 사모한다. 2.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평하고 투덜거리며 그를 미워하고 그에게 등을 돌리고, 율법이 그들의 죄와 또한 그 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드리워지는 형벌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 주므로 절망가운데 빠져갈 때에, 율법이 진노를 이루기 때문이다. 율법 그 자체는 의와, 하나님과의 일치, 하나님을 한 사랑 등을 산출한다. 그리고 율법 그 자체는 죄를 더한다. 다만 여기서 ‘더한다’ 는 단어를 좀 더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 자체로서는 작은 것을 더 크고 위중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위중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해 준다는 뜻이다.”
위에서 분명하게 보았듯이 불신자들에게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며, 형벌에 대하여 두려워하게 되며 그러므로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알게 하고 절망가운데서 주님을 찾게 하는 것이 율법과 복음의 기능이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제 3문, 제 4문과 5문답에 대하여 71-77page 있는 내용을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3문: 그대의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답: 하나님의 율법에서 압니다.
사람의 비참함이란 타락 이후의 사람의 처절한 상태로서 두 가지 큰 악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첫째는 인간 본성이 부패하고 죄악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이 부패성으로 인하여 인류가 영원한 정죄 아래 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되어 마땅한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비참함을 이는 지식은 하나님의 율법에서부터 얻어진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 기 때문이다(롬 3:20). 율법은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신 27:26). 율법이 어떻게 우리의 비참함을 알게 해 주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어지는 요리문답의 두 질문이 가르쳐준다.
4문: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마태복음 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5문: 그대는 이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답: 절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앞의 질문과 연결되는 것으로서, 우리의 비참함을 율법에서 알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임을 가르친다. 첫째는 우리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보는 것이요, 그리고 둘째는 율법의 저주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 본다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순결함이 과연 우리 속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보면 우리의 모습이 율법이 요구하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입증된다. 율법은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는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反感)과 미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은 이웃을 향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하나. 우리에게는 이웃에 대한 적의(敵意)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서,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를 정죄하는 바 우리의 비참함의 첫 부분, 즉 우리의 부패성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롬 8:7 엡 2:3; 딛 3:3 등). 실천적인 삼단논법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킨다. 여기서 대전제(大前提)는 바로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는 율법의 음성이다(신 27:26; 갈 3:10). 그리고 소전제(小前提)는 양심이 확증해 준다. ‘나는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못했다.’ 그리고 결론은 율법의 선고를 그대로 확정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다.” 각 사람의 양심은 이러한 삼단논법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실천적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하나님의 율법이요, 소전제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지식이요, 결론은 죄로 인하여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의 선고를 인정하는 것인데, 양심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이 삼단논법이 마음에 형성되는 것이다. 율법의 선고로 말미암아 슬픔과 절망이 우리에게 생기게 되는데, 복음의 위로가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우리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기 전에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알게 되며, 또한 우리가 영원한 정죄 아래 있음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의 비참함의 둘째 부분을 이룬다. 이 논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율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순종을 요구하며, 또한 이것을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영원한 형벌과 정죄를 선고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이 순종을 이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정죄 아래 두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율법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율법은 죄를 깨달은 자에게 자신이 죄의 정죄 아래 있음을 알게 함으로써 비참해 지는 상태를 설명한다. 그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문답은
“1문: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하여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라고 말함으로 인간이 죄인된 상태, 그리고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하고 유일한 위로인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웨스트민스터와 대요리, 소요리 문답을 통하여 율법의 기능과 준비 교리가 일치하다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정성우 목사는 Jericho College and Seminary를 졸업하고,
칼빈과 청교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는 인천 청라지역에서 개혁주의 교리에 입각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안에 하나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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