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이유는 요즘 “준비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인식 또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교수들이나 목사들이 “준비교리”에 대하여 공격을 하기에 이 글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소하게 생각하는 “준비 교리”에 대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조금씩 밝히고자 한다.
나는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 책의 번역자이다. 작은 교회의 담임 목사를 하고 있다. 우선 “준비 교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츠빙글리와 칼빈이 말하고 있는 율법의 3용도를 이해해야 한다. 청교도들이 말하는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와 카톨릭 또는 알미니안들이 주장하는 준비주의(preparationism)와는 분병하게 구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사들과 교수들은 이러한 분별없이 무조건 청교도 회중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를 이단성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힘들다. 그리고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 청교도 회중주의자들만이 주장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물론 앞으로 계속 이어질 글을 통하여 분명하게 스코트랜드 장로파 사람들 즉 예를 들어 윌리엄 거스리와 사무엘 루더포드 등, 장로파 쪽에서도 분명하게 청교도의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기능이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와 같은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우선 “은혜로 말미암은 준비”라는 책의 조엘 비키와 공동 저자인 폴 스몰리 교수가 말하는 준비 교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보편적인 방식이 있다는 개념인데, 그 방법은 죄인들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자신의 영적 필요에 대해 자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준비주의’(preparationism)는 구원받도록 준비되기 위해 죄인들이 스스로를 일정한 영적 수준까지 올려놓을 수 있다는 (따라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개념을 주장하는 사람의 율법주의 사상을 비판할 때 쓰이는 용어입니다.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의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죄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눅 5:32). 반면 준비주의(preparationism)는 비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기 때문입니다(갈 2:16). - 폴 스몰리와의 인터뷰에서
스몰리 교수도 준비 교리와 준비주의와는 분명하게 구분시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준비 교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를 의롭다 생각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죄의 각성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라는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성령께서 죄의 각성으로 인도하는 원리가 준비 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 교리를 인간이 할 수 없고 오직 성령께서 말씀(율법)을 통하여 죄인들을 각성시키시는 역사에 대하여 구체적이며 교리적으로 명시한 것이 준비 교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스몰리 교수는 “청교도들은 ‘한 사람을 그리스도를 믿는 구원 얻는 믿음으로 이끌어 오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를 각성시키시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겸손함을 주신다’고 가르쳤습니다.”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사회자가 스몰리 교수에게 “왜 목사들이 시간을 들여 준비 교리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교리가 목회 사역에 있어서 어떻게 중요합니까?”란 질문에 스몰리 교수는 이렇게 답한다.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특별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권고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만일 당신이 잃어버린 영혼에게 특별히 말씀을 선포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율법과 인간이 그 계명들을 깨뜨린 사실에 대해서도 말해 주어야 하겠습니까?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겪고 있는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상담하러 찾아왔다면 그에게 뭐라고 해 주시겠습니까? 그런 것은 정신에 해롭고 하나님의 사랑과도 반대되니 그냥 떨쳐버리라고 조언할 것입니까? 죄책을 느끼고 삶을 개혁하려고 하고 있다면 이미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해줄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로 접근할 수 있는 실질적인 것들입니다.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는 죄책감과 두려움을 갖게 하는 율법의 정죄의 능력이 복음 전도(evangelism)에 있어서 유익하다고, 그렇지만 그 자체가 구원할 수는 없다고 가르쳐 줍니다. 오직 복음만이 구원 얻는 믿음의 도구가 됩니다. 준비는 거듭나기 전부터도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게 (그리고 간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요 16:8). 그러므로 이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존귀하게 합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준비 교리는 칼빈이 말하는 율법의 기능 즉 율법의 3 용도에서 1용도와 2 용도와 같은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2권 7장 6-8, 10-13절에서 율법의 3 용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 율법은 엄격하므로 우리에게서 자기 기만을 제거해 준다
도덕법은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 의를 보여주는 한편,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불의함을 경고하고, 알려주고, 인정케 하고, 결국 정죄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애로 눈멀고 마비되었으므로, 자신의 허약함과 불순함을 알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허망함을 명확히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정신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으로 부풀어 있으며, 자기 멋대로 택한 척도를 가지고 자기 힘을 재는 한 자신의 빈약함을 인정하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힘을 율법의 어려움과 비교하기 시작하자마자 그의 오만불손함은 줄어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에 대하여 아무리 놀라운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곧 율법의 무거운 짐에 눌려 헐떡이며 비틀거리다가 마침내는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율법이라는 학교에서 배워서 이전에 그를 눈멀게 만들었던 교만을 던져버린다. 마찬가지로, 그는 다른 질병, 즉 교만을 고쳐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교만이라는 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인간이 그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도록 허락되어 있는 한, 그는 위선을 의로 가장하고, 이에 만족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려 자기도 알지 못하는 거짓된 의를 내세우게 된다. 그러나 한번 자기의 인생을 율법의 저울에 놓고 달아보게 된 후에는 모든 허구적인 의를 버리고, 그가 거룩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사실 전에는 자신이 순결하게 생각했던 것이 모두 무수한 죄악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정욕이 숨어 있는 곳은 아주 깊고 구불구불하기 때문에 쉽게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나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라고 옳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이 탐욕을 그 매복한 곳에서 끌어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주 은밀하게 비참한 인간을 파멸시켜 그는 심지어 그 치명타를 느끼지도 못한다.
7. 율법의 정죄 기능은 그 가치가 감소되지 않는다
율법은 거울과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이 연약함에서 유래하는 불의와, 결국 이 연약함과 불의에서 오는 저주를 보는데, 그것은 마치 거울이 우리 얼굴의 흠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인간이 의를 따를 힘이 없을 때에는 죄악의 흙탕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악에는 저주가 따른다. 따라서 율법이 우리를 유죄로 판정하는 범죄가 커지면 커질수록 거기에 대응해서 우리에게 부과되는 심판은 더욱 무거워지게 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적절하게 말했다. 거기서 그는 죄인들이 아직도 중생하지 못한 때에 경험하는 율법의 첫째 기능만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즉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롬 5:20), 그리고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고후 3:7)으로서, "진노를 이루게"(롬 4:15) 하며 죽인다. 양심이 자기의 죄를 분명히 인식하며 가책을 받을수록, 불의도 더 커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입법자에 대한 완고한 불순종이 범행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율법은 죄인을 파멸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무장시킨다. 율법 자체로는 고발하고 정죄하고 파멸하는 일만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쓴 것과 같이 "은혜의 성령이 없다면,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고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율법을 훼손시키거나 그 우월성을 빼앗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우리의 의지가 율법에 순종하도록 완전히 준비가 되기만 한다면, 율법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육적이고 부패된 본성은 하나님의 신성한 법에 맹렬하게 대항하여 싸우고, 율법의 징계에 의해서는 도저히 교정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적당한 경청자(傾聽者)만 만난다면 구원을 주기로 되어 있던 율법이 죄와 사망의 기회로 변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범법자로 판명되기 때문에, 율법은 더욱 명백하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이면 보일수록, 반대로 그것은 우리의 불의함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에서 생명과 구원의 상급이 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분명히 확증하면 할수록 그것은 악인의 멸망을 더욱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격언들이 율법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를 더욱 분명히 밝혀주는 데 큰 효과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사악함과 부패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의해 우리 앞에 공개적으로 제시된 복된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율법의 도움 없이 우리를 키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향기로워지며, 우리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 주는 그의 자비는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새로운 은사를 더해 주는 일에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8. 율법의 정죄 기능은 신자와 불신자에게 모두 행사된다
우리 모두가 사악하고 정죄받는다는 것은 율법의 증거에 의해 확인된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증거에 의해 유익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것은 우리를 절망 가운데 쓰러뜨리거나 아주 낙담하여 절벽 위에서 곤두박질해서 떨어뜨리기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악한 자들을 위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율법의 지식이 또 다른 목적을 지녀야 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실제로 율법의 심판에 의해 정죄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고 증거한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같은 것을 가르쳤다. 즉,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신 가운데 가두어 주심은 모든 사람을 파멸케 하기 위함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이 말씀의 의미는 그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어 주시기에 서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리고 빈손 들고 나아가 그의 자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안에 깊이 피신하며, 의와 공로를 위해 그 자비만을 붙잡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참 신앙을 갖고 구하며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교훈 가운데서 우리에게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완전한 의를 상급으로 주는 분이시며, 반대로 악한 행동에 대하여는 준엄한 심판자가 되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충만한 빛을 가련하고 무가치한 우리 죄인들에게도 비추고 있다.
10. 율법은 악인들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한다
율법의 두번째 기능은, 적어도 형벌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켜, 율법의 절박한 위협을 듣지 않는다면 공정하고 옳은 것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억제된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감동받거나 충동받기 때문이 아니라, 말하자면 재갈을 물린 것처럼 그들의 손이 외부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또 억제되지 않는 한 제멋대로 날뛸 수밖에 없는 부패를 내부에만 얽매어 두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선하지도 않고 또 의롭지도 않다. 그들은 공포나 수치에 의해 저지되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을 감히 실천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정욕의 횡포를 공공연하게 발산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복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실로 그들이 자신을 억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되며, 내부에서 끓어올라 율법의 공포가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나 행할 차비가 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율법 자체를 악랄하게 싫어하고 또 입법자 하나님을 저주하고 있기 때문에, 만일 할 수만 있으면 그를 제거하려고까지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옳은 일을 하라고 명령할 때나 또는 그의 존엄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보복할 때에, 그들은 그 하나님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그래도 자발적으로 율법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그리고 그것을 반대하지만 엄청난 공포로 인해 순종하게 되었음을―희미하게 혹은 분명하게―느낀다.
그러나 이 억제되고 강요된 의는 인간 사회를 위하여 필수적인데,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인간 사회가 평온하도록 마련하신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에게 모든 일을 허락한다면,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그들이 부름을 받기 전, 그리고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롬 1:4), 육신의 무기력 가운데 빠져 있는 동안은, 이러한 보호 감독 밑에 있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수가 두려워 그들은 최소한 외적인 난동은 억제되는 동안 마음으로는 아직 길들지 않았으므로 현재로서는 약간의 진보밖에 이룩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의의 멍에를 담당하므로 부분적으로는 길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에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규율에 대해 전혀 교육받지 않고 초보 지식도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은 특히 율법의 이 기능에 대해 언급한 듯하다.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라"(딤전 1:9-10). 여기서 그는 율법은 고삐와 같아서, 무제한으로 날뛰며 횡포를 일삼는 육신의 정욕을 억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1. 율법은 아직 중생하지 못한 자에게는 굴레가 된다
다른 곳에서 바울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갈 3:24)라고 한 말은 율법의 두 기능에 다 적용될 수 있다. 즉, 율법이 몽학선생이 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사람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중 첫째 종류는 이미 언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덕이 있고 의롭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먼저 자신들을 비우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않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율법은 그들을 꺾어 겸비케 하여 전에는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었다고 깨닫지도 못하던 것들을 추구하도록 그들을 준비하도록 해준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재갈이 필요하다. 즉, 그들이 의에 대한 모든 추구를 포기하게 할 정도로 날뛰는 육신의 정욕을 재갈로 억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지 않는 곳에는 때때로 정욕이 맹렬히 불타올라 육욕으로 향하는 영혼이 하나님에 대한 망각과 멸시로 빠져들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만일 하나님께서 이 구조책을 강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왕국의 기업을 상속시키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즉시 중생시키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오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공포 아래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신다(벧전 2:12). 이 공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정결하고 순수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들의 능력에 따라서 그들에게 참 경건을 가르치기에 유익한 공포심을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아주 많은 증거가 있으므로 예를 들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느 기간 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냈던 자들은 모두 다음 사실들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율법의 굴레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어떤 두려움과 경외심을 갖도록 얽매어 있다가, 마침내 성령에 의해 중생되어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12.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
율법의 세번째 용도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율법의 본래 목적과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 마음속에 이미 하나님의 성령이 살아서 다스리고 있는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기록하고 새긴 율법이 있기는 하지만(렘 31:33; 히 10:16), 즉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바라도록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감동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율법에 의해 두 가지 방법으로 혜택을 받고 있다.
율법은 그들이 앙모하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날마다 더 철저하게 알고 그들을 납득시켜 그것을 확신케 하는 최선의 도구가 된다. 이것은 마치 어떤 시종이 자기 주인에게 칭찬받기 위하여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모든 습관을 자세히 알아내어 지키기 위하여 자기를 거기에 적용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어느 누구도 이 필연성으로부터 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아직 율법에 의하여 날마다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관한 더욱 순전한 지식에로 새로운 진보를 이룰 수 없을 정도의 지혜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또 우리에게는 가르침 뿐만 아니라 권면도 필요하므로, 하나님의 종은 또한 율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익을 얻게 된다. 즉 율법을 자주 묵상함으로써, 그는 복종하도록 자극받고 강화되며 범죄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함 받는다. 이런 방법으로 성도들은 전진해야 하는데, 이는 아무리 그들이 성령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행하려 노력한다 할지라도, 육신의 태만이 언제나 그들을 내리눌러 그들이 마땅한 준비를 갖추고 전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율법과 육신의 관계는 게으르고 머뭇거리는 나귀를 일깨워 일하도록 하는 채찍의 관계와 같다. 아직 육신의 짐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지 못한 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도, 율법은 부단히 찌르는 가시가 되어 그로 하여금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지 못하도록 한다. 다윗이 다음과 같이 율법을 찬송하는 시를 노래할 때 그는 용도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즉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7-8). 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이다"(시 119:105). 같은 시편에 유사한 말씀이 무수히 많이 있다(예, 시편 119:5). 이 말들이 바울의 진술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즉, 바울은 중생한 자를 위한 율법의 용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인간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예언자는 율법의 효용이 얼마나 큰가를 선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적으로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읽을 때에 그들을 교훈하신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계명만을 언급하지 않고, 여기에 부수되어 오는 은혜의 약속, 즉 쓴 것을 달게 해주는 유일한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만일 율법이 다만 명령하고 위협함으로써 영혼들을 공포로 괴롭히고 위협을 통해 고민하게 한다면, 율법보다 더 싫증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윗은 특별히 그가 율법에서 중보자를 이해했으며 중보자를 떠나서는 어떤 기쁨과 즐거움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13. 신자에게는 율법이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자는 율법을 잘못 이해한 자이다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구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성급하게도 모세의 율법 전체를 배척하고 율법의 두 돌판에게 이별을 고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고후 3:7)이 들어 있는 교리를 주장하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백히 이질적인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생각은 우리 마음에서 버려야 하겠다! 모세는 율법이 죄인들에게는 죽음을 만들어내지만, 성도들에게는 한층 더 좋고 더 탁월한 효력을 지녀야 한다고 적절하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임종시에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는 너희에게 허사가 아니라 너희 생명이니"(신 32:46-47). 그러나 어느 누구도 율법 가운데 의의 완전한 표준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바르고 공정한 생활을 위한 규범이 필요치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율법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금지된다. 물론 삶을 위한 규범들은 많다. 그러나 우리가 표준으로 할 수 있는 영구 불변한 규범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다윗이 의인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한다고 했는데(시 1:2), 이 말은 단지 어떤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아니 세상 끝까지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율법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매우 엄격한 도덕적 순결을 요구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율법을 무서워하고 그 교훈에 놀라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율법은 지금 우리에게 그 요구 조건들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가혹한 집행관으로 행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에게 권고하는 완전함은 우리가 도달하기 위해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임을 지적한다. 이 점에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에 일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익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노력에 실패하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실제로 이 생애 전체는 하나의 경주라고 볼 수 있는데(고전 9:24-26), 그 길을 다 달리고 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멀리서부터 경주한 이 목표에 도달한 상급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율법의 첫째 용도는 죄된 인간들이 자신들의 죄를 개닫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둘째 용도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비참함을 느끼고 율법으로 정죄 받아 양심의 괴로움을 통하여 죄의 각성이 일어나며 교만한 자가 겸손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찾게 된다. 셋째 용도는 성도들이 계속해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 해 나아갈 수 있도록 참된 것을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바로 칼빈이 말한 내용이 준비 교리이다. 즉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죄인된 인간, 고집스럽고 교만한 인간을 낮추시며 죄의 각성 가운데 인도하시며 그들의 심령을 겸손케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 또는 원리가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라 말하는 것이다. 카톨릭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준비주의((preparationism)와는 분명하게 다르다. 준비주의(preparationism)는 스몰리 교수가 말하였듯이 구원받도록 준비되기 위해 죄인들이 스스로를 선행과 인간의 의지로 여러 가지의 일정한 영적 수준까지 올려놓을 수 있다 율법주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말하는 율법의 기능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확실히 집고 넘어 간다면 준비교리(Doctrine of preparation)는 율법의 기능 즉 성령께서 율법(말씀)을 통하여 죄인들을 비참하게 하며 죄의 각성으로 인도하고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깨닫고 스스로 주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준비 교리(Doctrine of preparation)이다.
물론 앞으로 밝히겠지만 이러한 율법의 기능이 칼빈은 분명 죄인들 즉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 조명을 통하여 시작됨을 말하듯이 청교도들도 칼빈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화란 개혁주의 자들은 율법의 기능이 죄인된 자들 즉 중생 전에 오기보다는 회심 다음에 온다고 주장함으로써 또 다른 잘못된 주장을 현대 한국 교회내에서 말하고 있는 목사들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
정성우 목사는 Jericho College and Seminary를 졸업하고,
칼빈과 청교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현재는 인천 청라지역에서 개혁주의 교리에 입각하여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예수안에 하나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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