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믿음} 정이철 <웨신서에서 행위언약 나오는 것 보고 칼빈이 무덤에서 벌떡>
위 링크 글에서 정이철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고백한 ‘행위(생명)언약’을 두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분명히 아담이 완전한 생명이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고, 아담은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한 생명을 얻어야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아담을 살리고 죽이는 그 법이 훗날 시내산에서 십계명으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아담은 지금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부르는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여 영생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주장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오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아담이 완전한 생명(영생, 죽을 수 없는 영화로운 몸으로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없는 상태로 창조”됐다는 사실은 정이철 스승 서철원 목사님, ‘서철원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③: 인간론}’과 ‘서철원 {창세기 주석 ①}’에도 적힌 내용이다. 또한 “아담은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한 생명을 얻어야 했다”는 사실 역시 한가지(同)다. 그러므로 서철원 신학에 “행위(생명)언약 나오는 것 보고” 행위(생명)언약의 창시자이신 어거스틴 선생님과 “칼빈” 선생님께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다.
위 링크 글에서 정이철이 “이러한 신학적 주장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오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며 그 근거로 적은 성경 구절이 있다. {성경} 전체를 보는 사고 없이 이단들처럼 보고 싶은 구절만 보는 확증편향으로 적은 ‘로마서 5장 13절’과 ‘히브리서 7장 19절’이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롬 5:13)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 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히 7:19)
나는 ‘바울 사도께서 로마서 5장 13절에서 말씀하신 “율법”은, 창조 시 하나님께서 아담(人) 마음에 새기긴 율법으로서 불문법不文法이 아닌, 하나님께서 돌판에 글자로 새겨주신 성문법成文法으로서 시내산 율법이다.’는 사실을 밝혔다.
위 링크 글에서 정이철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조건으로서 계명을 준수하기를 명하셨다는 웨신서의 행위언약 사상은 칼빈의 신학과는 무관한 이론입니다.”며 또 {기독교 강요} 구절들을 적어 그 근거를 제시한다. 물론, 나는 ‘정이철이 그 근거로 적은 {기독교 강요} 구절들은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이 보고 싶은 구절들만 보고 적은 구절들이다.’는 사실을 수차례 밝혔다.
각설하고, 정이철이 칼빈 선생님을 무덤에서 불러낸 위 링크 글은 정이철의 화인 맞은 양심을 증명한 글, 화인 맞은 양심으로 거짓증거를 일삼은 글일 뿐이다. 우리 개혁 신앙의 선조 칼빈 선생님을 자기편으로 만들려는 화인 맞은 양심으로 칼빈 선생님을 무덤에서 불러낼 일이 아니라, <우리 교수님은 정통 교회가 가르친 능동 순종을 영구진리로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에서 “그가 무흠하게 머물렀더라면 첫 사람은 더 나은 생명으로 넘어갔을 것이다.”는 칼빈 선생님 가르침을 인용해 “우리는 칼빈의 말이라도 성경에서 벗어나면 가벼이 버려야 마땅합니다.”고 했던 대로, <추종자 님! 사람의 사변을 버리고 성경으로 갑시다!>에서 “혹시 칼빈이 자주 오락가락했다면 칼빈도 버리는 것이 맞다.”고 했던 대로 “오락가락”이라는 말로 칼빈 선생님을 단죄하면 됐기 때문이다.
정이철 목사가 예장 고신 박영돈 교수님을 이단몰이할 때 나는 정이철 목사 화인 맞은 양심을 읽었다.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 특징은 창피를 모른다는 것이다. 창피를 모를 정도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은 짐승과 같다. 그러므로 창피를 모르는 짐승과 같은 사람, 우직한 소(牛)로서 정이철 목사에게 이 비평문은 “쇠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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