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선생님께서는 {로마서 주석}에서 ‘우리 칭의를 낳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설명하시면서 “제유법”ㅡ진리의 한 부분으로 진리의 전체를 설명하는 수사법. 바울 사도께서 그리스도 십자가만을 이야기해도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신 그리스도 십자가에는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그리스도의 모든(全) 구속 사역이 담겨 있음.ㅡ이라는 용어로 그리스도 십자가를 설명하신다. 그러므로 전全 생애에 걸쳐 흠 하나 없이 경건하셨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생명의 길로서 율법, 그 약속인 그리스도 부활(칭의)을 낳는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의 극치’라는 점에서 <그리스도 십자가만을 믿는 것은 헛된 믿음이다.>는 제목은 오해를 낳을 수 있는 과한 제목이다. 그러나 예장 합동 꼴뚜기(서철원)파 Wolf들이 ‘전全 생애에 걸쳐 율법의 의에 비춰 흠 하나 없이 경건하셨던 그리스도’를 건너뛰어 ‘그리스도 십자가’만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더군다나 예장 합동 꼴뚜기파 대표 꼴뚜기 Wolf이철이 “그리스도 본래(본질, 신성神性)의 의, 그 의의 전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 제목은 결코 과한 제목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 15:17)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딤전 2:5)
{바른 믿음} 정이철 <김효남 개혁신학 vs 성경적 개혁신학, 거대한 총회를 둘로 분리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해법>
Wolf이철이 내게 관심도 없는 까닭으로 또 스스로 이단임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한 위 링크 글을 {바른 믿음}에 남겼다. 그래서 힘들기는 하지만 또 도돌이표 비평문을 써야만 한다. 물론, Wolf이철은 내게 관심도 없는데, 또 도돌이표 비평문을 써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기만 하다. 다음은 위 링크 글에서 옮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우리 합동과 총신은 이제까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죽은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죄인들을 살리는 의가 되시려고 작정하셨다고 배웠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그대로 가지는 사람으로 성육신하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고, 동시에 믿음과 성령 안에서 자신을 죄인들에게 연합시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본래의 거룩과 의를 죄인들의 옷으로 선물하여 칭의를 만드셨다는 것이 총신과 합동이 지금까지 배우고 가르친 칭의 신학이었다. 성경도 합동과 총신이 가르쳐 온 칭의 신학과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예장 합동의 역사는 서철원 목사님이 예장 개혁을 떠나 예장 합동으로 가신 1991년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1991년부터 시작됐다고 치자. 서철원 목사님이 총신신대원에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본래의 거룩과 의를 죄인들의 옷으로 선물하여 칭의를 만드셨다.”고 가르치셨다면, 이는 ‘마지막 아담(人)으로 오신 중보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허무는 가르침, 이단의 가르침일 수밖에 없다.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만드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마 3:9)이실지라도, 하나님의 구속 경륜은 돌들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만드시는 일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인간 중보자 그리스도 구속 사역으로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의 본래의 거룩과 의”의 전가나 혹은 “그리스도 자신의 본래의 거룩과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신화人間神化, 신인합일神人合一’을 주장하는 이단의 가르침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굳이 여기에서, “그리스도 본질(신성神性)의 의, 그 의의 주입1)을 주장한 루터교 오시안더Osiander 목사를 칼빈 선생님께서 {기독교 강요}에서 단죄하셨음”을 또 도돌이표 앵무새처럼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기독교 강요}를 맥도날드에서 읽었다는, 자칭 “맥도날드 신학자” Wolf이철이 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칼빈 선생님께서 {기독교 강요}에서 오시안더 목사를 단죄하셨던 항들’을 못 봤는지, 로마서 1장 17절과 3장 23절에 적힌 “하나님의 의”를 오시안더 목사와 똑같이 “하나님 자신의 본래의 거룩과 의”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를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3권} [11장] <5항>이다. 원광연 목사님께서 우리말로 옮기셔서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2003년에 펴낸 {기독교 강요}에서 옮긴다. 들여쓰기 없이 ‘-’를 써서 옮긴다. 밑줄은 내가 긋는다. 배경색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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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시안더가 주장하는 “본질적 의”의 개념
그러나 오시안더(Osiander)가 “본질적 의”(essential righteousness)라는 괴상한 괴물을 소개해 ㅡ물론, 값없이 주시는 의를 의도적으로 망가뜨리려 하는 것은 아니지만ㅡ 칭의의 교리를 깊은 안개로 휩싸이게 만들어서 경건한 사람들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문제들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이 정신 나간 몽상夢想을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중략)…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도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이 원리를 잘못 적용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義이신 것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오, 의의 근원이시오,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다른 곳으로 미뤄야 할 내용을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도, 독자들께서는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오시안더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가 다른 뜻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견해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희생의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얻어진 의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품성 모두를 주입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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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칼빈 선생님께서는, “그리스도 본래(본질)의 의”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과 희생의 돌아가심으로 획득하신 의’를 말씀하시며 ‘그리스도 본질의 의를 주입받는 칭의를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간 중보자 자리에서 끌어내려 그리스도 구속 사역을 허문 오시안더 목사’를 단죄하신다. 그러함에도 맥도날드 신학자 Wolf이철이 “그리스도 안 본래의 의”를 주장하며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예레미야 23장 6절과 예레미야 33장 16절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돼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6).
그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렘 33:16)
Wolf이철은 이 두 구절을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40쪽~41쪽에서 인용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 본래의 의, 그 의의 전가”를 주장하는 Wolf이철과 똑같이 이 두 구절을 “그리스도 안 본질의 의, 그 의의 주입”을 증거하는 구절로 인용한 어리석은 목사가 있다. 물론, 오시안더 목사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3권} [11장] <8항: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으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류>에 옮긴다. ㅡ이 항 전문全文은 아래 ‘각주란 2)’에 들여쓰기 없이 옮긴다.ㅡ
오시안더는 어리석게도 여호와께서 우리의 의가 되실 것을 약속하는 예레미야서 한 구절을 자랑삼아 근거로 제시한다(렘 51:10 참조, 23:6:33:16).…(중략)… 그런데도 오시안더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반론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얻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해 기뻐 뛰며, 여러 면을 할애해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것이다.
Wolf이철은 자신의 어리석음은 모른 채 어리석은 오시안더 목사처럼 “마치 모든 것을 다 얻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해 기뻐 뛰며” “거대한 총회를 둘로 분리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해법”이라며 “호언장담” 기고만장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어리석음을 모르는 이 기고만장은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은 {능동적 순종에 빠진 교회} 4쪽~5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저는 하나님께서 한국 개혁교회 신학의 심각한 불순물을 정리하시는 일에 쓰임 받은 것으로 매우 행복합니다. 저의 생애가 다 하는 날까지 이와 같은 일로 하나님의 지속적인 쓰임을 받기를 소망합니다.
…(중략)…
10월 6일 늦은 밤에 이 책의 본문의 대부분의 내용을 마쳤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게 하시고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이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셨는지에 대해 깨닫고 신앙생활이 더 견고하고 풍성해지는 복을 누리는 분이 나온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하게 하시고 힘을 주시지 않았다면,”??????? 참 대단한 착각이다. 예장 합동 꼴뚜기파에 속한 Wolf들과 교인들은 이 문장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믿음으로 보겠지만, 내 관점에서는 리플리증후군 중증을 앓고 있는 Wolf이철의 “정신 나간 몽상夢想”일 뿐이다. 지식을 좇지 않은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경륜에서 버림을 받아야만 했던 이스라엘(롬 10:2)처럼 지식을 좇지 않은 Wolf이철 열심에서 나온 헛된 믿음일 뿐이다.
{개혁 정론}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예장 고신 총회의 신학적 입장]
http://reformedjr.com/index.php?document_srl=1039769&l=ko...
위 링크 글 <4) 칼빈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에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는 “이와 같은 주장은 주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만 의존하고 있다. 칼빈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강요}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엄청난 주석도 참고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설교문이나 신학 논문도 살펴야 한다.”고 밝힌다. 그런데 {기독교 강요}에만 의존할지라도 {기독교 강요}에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획득하신 의와 그 의의 전가 교리’는 명명백백하게 존재한다.
“그의 설교문이나 신학 논문도 살펴야 한다.”…. 내가 {바른 믿음} {독자 마당}에 올리기도 했던 글, ‘존 칼빈 {갈라디아서 강설}’에 적힌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획득하신 의와 그 의의 전가 교리’3)도 {개혁신앙 푸르내}에 옮겼고, 예장 합신 전종득 목사님이 {페북}에 올리셨던 칼빈 선생님 주석, ‘그리스도께서 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와 그 의의 전가’를 말씀하신 칼빈 선생님 주석, <에스겔 18장 17절 주석>4)도 {개혁신앙 푸르내}에 옮겼으니, 다음은 칼빈 선생님 또 다른 강설집에서 옮기는 글이다. 즉, ‘존 칼빈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엄성옥 역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89)’ 111쪽에서 옮기는 강설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밑줄도 마찬가지다.
한편 가롯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죄되심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정죄 받으심 속에서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정죄 받으심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 아들의 고난과 죽음의 열매를 나눠 갖도록 부르심을 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이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더욱 잘 알기 위해 본문의 두 가지 본보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선이 우리에게 전달돼 우리도 그것을 소유하게 돼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비로소 이뤄집니다.
“획득하신 선”을 ‘획득하신 의’로 독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있다면, 그들은 유치원생들보다 문해력이 낮은 예장 합동 꼴뚜기파 Wolf들일 것이다. 또한 이 ‘의’를 오직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당하신 십자가에서 획득하신 의”로만 주장하고 싶은 어른들 역시 그들일 것이다. 이 점에서 또 도돌이표 인용을 할 수밖에 없다. 다음은 {기독교 강요 제2권} [16장] <13항>에서 옮기는 글이다. 굵은 글씨는 내가 굵은 글씨로 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그리스도 죽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 산 소망이 있”(벧전 1:3)다. 그분께서 다시 사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자로 나타나심과 같이, 우리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분 부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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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생 시 의의 주입’은 칼빈 선생님께서 {기독교 강요}에서 말씀하신 정통 개혁신학임에도, Wolf이철이 “나는 주입이 아닌 그리스도 안 본래(본질)의 의를 옷으로 덧입혀 주시는 전가를 말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중생 시 의의 주입’은 로마 천주교 전매특허 용어가 아님은 다음 두 글을 참고하라.
존 칼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중 은혜: ‘중생 시 부여(주입)하신 의’와 ‘칭의 시 전가하시는 의’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VZ/56
‘의義(은혜)의 주입’은 로마교가 전매특허 낸 용어가 아닙니다.
https://cafe.daum.net/reformedvillage/D3MR/128
2) 제8항: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으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루면서 오시안더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외적外的인 말씀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내적內的인 말씀이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이로써 그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중보자의 직분에서 끌어내어 그분 영원한 신성으로 이끌어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나누지 않는다. 다만, 그 육체로 우리를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사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라는 것과 또한 만일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그가 중보자의 임무들을 수행하지도 않으셨을 것이요 우리를 위해 의를 얻지도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을 고백할 뿐이다.
그러나 오시안더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므로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의가 되신 것은 그분 인성人性이 아니라 신성神性과 관계된 일이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일이 그리스도 신성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일은 그리스도께만 특별히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성령께도 똑같이 관계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나 아버지의 의나 성령의 의나 서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성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부터 계셨으므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의가 되셨다.”는 표현도 일관성이 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설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의가 되셨다손 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가 되셨다는 바울 사도의 말씀(고전 1:30)과 그것을 과연 어떻게 조화롭게 하겠는가? 우리를 위해서 의가 되시는 일은 중보자에게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역할인 것이다. 물론 그에게 신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함에도 중보자라는 칭호는 아버지나 성령과는 구별돼 그만이 홀로 지니시는 독특한 칭호인 것이다.
오시안더는 어리석게도 여호와께서 우리의 의가 되실 것을 약속하는 예레미야서 한 구절을 자랑삼아 근거로 제시한다(렘 51:10 참조, 23:6:33:16). 그러나 그가 거기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그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밖에는 없는 것이다(참조, 딤전 3:16). 다른 곳에서 우리는 바울의 설교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라는 말씀을 인용한 바 있다. 그런데 혹 어떤 사람이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흘리신 피가 하나님의 피요, 따라서 신성을 지닌 것이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과연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용납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시안더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유치한 반론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얻기라도 한 것처럼 의기양양해 기뻐 뛰며, 여러 면을 할애해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것이다.
곧 여호와께서 친히 다윗의 자손이 되사 경건한 자들의 의가 되실 것이라는 뜻으로 곧바로 간단히 설명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지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내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사 53:11). 여기서 우리는 말씀하시는 분이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의롭게 하는 직분을 부여하시며, 또한 아들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그 까닭으로 덧붙이시며, 또한 의롭게 하는 방식을, 혹은 수단을 그리스도를 아는 가르침 속에 지정하신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히브리어 동사 다마트(히브리어 생략)는 수동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을 때(빌 2:7) 의가 되셨고, 그분께서 아버지께 드린 순종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빌 2:8), 따라서 그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에게 부여된 직분의 본질에 따라서 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물론, 오직 하나님만이 의의 근원이시며, 또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 안에 참여하는 길뿐이지만, 우리의 불행한 반역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義에서 유리(遊離)돼 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돌아가심과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이 차원 낮은 치유책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존 칼빈 <율법을 모두 철저하게 지키신 그리스도>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95
4) 그동안 {바른 믿음}에서나 {유튜브}에서 제 댓글들을 삭제만 해 오던 정이철 목사가 반응했습니다.
https://cafe.daum.net/reformedcafe/jMaU/255
그동안 {바른 믿음}에서나 {유튜브}에서 제 댓글들을 삭제만 해 오던 정이철 목사가 반응했습니
오늘 새벽에 {유튜브} 정이철 목사 동영상 댓글란에 ‘제 글 총신신대원 문병호 교수님께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이 간단한 질문을 할 사람이 없을까? 본문’을 적고, 링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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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동은 1981년 개혁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대학원)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에 속한 교회에 성도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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