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을 부정하신 서철원 목사님 머릿속 {사전}에 ‘율법준수’와 ‘율법의 성취(완성)’이라는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개념이 ‘성경의 개념이자 정통 개혁신학의 개념’에서 벗어나 기괴할 뿐이다. 그러니까 {서철원 신학사전}에 적힌 ‘율법준수’는 ‘죄인이 죗값을 갚는 일, 사형수가 사형을 당해 죗값을 치르는 일’로 돼 있다. 그러므로 ‘죗값을 갚는 일’이 곧 ‘율법을 성취(완성)하는 일’이다. 바꿔 말하면, ‘율법을 범한 적이 없는 의인(죄를 지은 적이 없는 의인)이 의(선행)를 행하는(율법을 지키는) 일’은 ‘율법준수’로 적혀 있지 않다.
다음은 ‘서철원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5권: 구원론} (서울: 쿰란출판사, 2008)’ 114쪽~115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서철원 목사님 좌충우돌 논리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글로, “거스리고”는 ‘거스르고’ 오타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6.1.2.2.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이룬 의를 전가한 것이 아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서 얻은 의를 전가한 것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합당한 신학이 아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 의를 이루셨다고 하면,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을 다 지켜야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데 이르게 된다. 그리스도의 의를 율법의 완수에서 온 의로 말함은 합당하지 않다. 의의 전가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이룬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시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가 피 흘려 이룬 죄용서를 말한다. 의의 전가를 그리스도가 율법준수로 획득한 의를 전가함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 용서 하심 곧 의롭다 하심이 무효가 된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으로만 된다(롬 3:24).
그리스도는 율법수여자로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요구 곧 율법을 범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성취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는 것은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서 제거함을 말한다(엡 2: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골 2:14)도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 율법을 지켜야 의를 얻는다는 의무를 우리에게서 제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는 율법의 준수 요구 곧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성취하시므로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다. 율법수여자만이 율법을 완수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율법준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율법준수의 요구가 늘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의를 얻기 위해서 율법준수를 이루신 것이 아니다. 의는 생존권을 뜻하는데 그리스도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를 획득하셨다고 하면, 그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논리력과 신학이 짧은 정이철 목사는 오늘도 ‘율법을 지키라.’는 율법의 요구와 ‘지키면, 의를 이뤄 생명(영생)을 얻으리라.’는 율법의 축복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위 인용문에서 예장 합동 꼴뚜기 스승 서철원 목사님은 “율법을 지켜야 의를 얻는다”는 율법의 축복을 이야기하신다. 물론, 그 축복은 ‘율법의 저주를 당하는 일’이다. 즉, {서철원 신학사전}은 “저주=축복”으로 저장돼 있는 기괴한 사전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야”를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을 믿는 우리, 우리 머릿속 {신학사전}에 적힌 개념으로 이해하면 결코 안 된다.
칼빈 선생님께서는 ‘존 칼빈 {갈라디아서 강해 하} 김동민 역 (서울: 서로 사랑, 2013)’ 78쪽에서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셨지만 우리를 해방해 주기 위해서 종의 직분을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알아둡시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셨으며 성인이 돼서는 모세 율법이 명령한 것들을 모두 철저하게 지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렇게 해야만 했기 때문이 아니고 노예와도 같은 우리 상태를 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한 것처럼 성경 말씀이 우리 자유를 언급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 자발 순종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고 하신다.
다음은 ‘서철원 {서철원 박사 성경 주석 시리즈: 갈라디아서} (쿰란출판사, 2020)’ 173쪽1)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그리스도는 저주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신 이에게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다. 따라서 저주가 올 수 없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은 저주를 다 지셨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를 십자가에 다셨기 때문이다. 율법의 저주를 다 그의 몸에 지워 그를 십자가에 다셨다.
“율법을 지켜야 의를 얻는다”가 ‘지키면, 의를 이뤄 생명을 얻으리라.’는 율법의 축복을 뜻한다면, “그리스도는 저주를 받을 수 없다. 그는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쪼끔 마음에 드는 해석이다. ‘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의 극치로서 그리스도 십자가’는 율법의 대강령인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형제)을 향한 사랑’의 절정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고난 이전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인 ‘지키라.’를 “다”(온전히) 성취하신 것은 아니라서, 온전히 마음에 드는 해석이 아닌 쪼끔 마음에 드는 해석이다.
그런데 “율법을 지켜야 의를 얻는다”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 곧 율법을 범한 죗값을 갚으라는 요구를 성취”하심’을 뜻한다면, 위 인용문이 뜻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이전에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음’을 뜻한다. 즉, ‘율법의 저주를 다 당하셨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위 인용문은 이단 몰이 사냥꾼 예장 합동 꼴뚜기가 “그리스도 십자가를 부정한(약화한) 이단의 글”로 정죄해야 할 글이다. 적어도, 이단 몰이 사냥꾼 예장 합동 꼴뚜기 신앙이 바른 신앙이라면, 그 바른 신앙으로 정이철 목사는 “자기 스스로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고”라며 ‘그리스도 자발 순종의 극치로서 십자가’를 격하한 이단, 스승 서철원 목사님을 “이단의 괴수”로 단죄해야만 한다.
============
1)
박채동은 1981년 개혁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대학원)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에 속한 교회에 성도로 섬기고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