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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파 개혁교회 목사가 주장한 회심 준비 교리

by 깨우는자동훈 2022. 9. 25.
본 글은 미국 장로파 개혁교회 목사인 “윌리엄 영”의 회심을 주제로 쓴 칼럼의 일부분입니다.
 
William Young 목사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Th.B.)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Th.M.) Union Theological Seminary (Th.D.)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로드 아일랜드의 장로교 개혁 교회를 섬겼고 2015년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회심을 위한 준비
1. 타락한 자연인은 그 자신의 힘으로는,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할 수가 없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선언은 회심을 위한 어떤 준비도 배제시키려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어왔다. 하지만, 신앙고백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이러한 추론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이 회개에 이르도록 스스로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아직 자연인의 상태에 있는 선택받는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 일반은혜로 준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또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의무들을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의무들은 섭리의 과정 가운데 자신의 회심을 위한 준비과정이 될 수 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큰 변화 이전과 이후의 죄인의 상태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대하는 편파적인 편견 때문일 수 있다.
2. 이렇게 잘못 판단하도록 하는 한 가지 요인은 중생을 수반하는 회심에 대한 혼돈이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거나 살아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여기서 중간상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즉각적인 변화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회심은 구별할 수 있는 단계들을 수반한 과정일 수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반복을 허용할 수 있으나, 중생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사도 베드로에게, “네가 돌아서게 될 때 네 형제들을 굳게 하여라”(눅 22:32) 말씀하셨을 때 그가 회심한 사람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마코비우스(1588-1644)는 윌리엄 에임스와(1576-1633)의 논쟁에서 중생으로 가는 준비를 전적 타락과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며 부인했다. [좀 더 일반적으로, 칼빈주의의 저자들, 특별히 장로교들과 청교도들은, 윌리엄 에임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주 이 주제와 관련하여 종종 가장 기초적인 구분을 하지 못하는 형편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준비주의”라 불리는 것에 대해 크게 거절하는 소식을 듣게 된다. 준비론의 실상을 인정했던 저자들 사이에서, 다양한 견해들이 나타났지만, 교리와 실천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합의가 존재한다.
3. 사무엘 러더퍼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Christ Dying and Drawing Sinners to Himself, 1803년판의 275-301페이지를 보라) 논의했다. 부정적으로 말해서, 준비가 회심의 어떤 사안에 관한 우리의 자연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의 일반적이고 제한적 은혜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회심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러한 죄에 대한 모든 수치심과 미움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회심의 정식적인 부분이 될 수 없다.” 준비가 그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어떤 약속을 수반한 도덕적인 준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회심에 대한 이러한 선행 과정들은 값없는 은혜의 전능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더라도(막 12:3),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참된 회개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 전에 진행되는 율법의 기능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러더퍼드는 도덕률 폐기론자, 특히 솔트마쉬의 사람들의 반대에 맞서 준비론을 옹호하는데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 몇 페이지에 걸친 논쟁 뒤에 좀 더 긍정적인 설명이 뒤따르는데, 그러한 설명 가운데 많은 흥미로운 논평들이 이루어진다.
 
첫째, 믿음의 이유가 자신이 궁핍한 죄인이라는 사실에 있는지 아니면 자신이 자비를 얻기에 적합하며 겸비해진 상태이기 때문인지에 대한 구별이 이루어진다. 겸비의 방식은 값없는 용서에 순조롭게 예속된다. 이러한 예들은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 바울의 회심, 로마서 3장의 논의에서 볼 수 있다. 러더퍼드는 특징적인 방식으로 요약한다: “준비는 심각성을 인식해서, 굴복하도록 하는 것이지, 공로로 인정받기 위한 도덕적인 원리가 아니다; 또한 회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조건적인 원리도 아니며, 단지 회심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297 페이지)
4. “복음의 약속은 죄인이 된 죄인들에게 주어진다”는 논문에 대한 러더퍼드의 논의는 특별히 흥미롭다. 이 주장이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죄 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가장 정확하고 온전하다. 하지만 도덕률 폐기론자들처럼, “죄인인 그들 모두는 즉시 그리스도와 그 약속을 믿고 적용할 수 있고; 그들 모두가 겸비함이나 어떤 율법의 기능 없이, 그들만의 방식과 순서 후에, 즉시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외에, 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장 거짓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자들에게도 그리스도가 제시 될 것이다. 마술사 시몬은 하나님이 자신을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그리고 복음의 약속은 마음이 굳어있는 죄인에게 즉시 영혼의 안식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또한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지도 않으며, 아름다움과 기쁨의 기름이 누구에게든 즉시 주어지는 법이 없고, 오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시온에서 슬퍼하며, 재 가운데서 뒹구는 자들에게만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마 11:28-30; 사 61:1-3). 생명력 있는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값이나 돈 없이 그리스도가 제시된다; 하지만 우리의 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방식과 순서가 있은 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참이다; 즉, 영혼이 구원에 대해 자기 절망의 상태에 있고, 죄인의 고백이 있은 이후인데, 그 전에는 영혼이 지옥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었다.” 러더퍼드는 시간과 관련해서는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너무 빨리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순서와 관련해서는 많은 이들이 너무 빨리, 준비가 안 된 채로 나온다”고 덧붙인다.
5. 러더퍼드는 그의 태도가 오해받기 쉽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리스도께 나오기 전에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적합한 사람은 존재할 수 없지만, 주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그들이 가진 전부를 팔아 진주를 사려할 것은 사실이다.” 정통파의 준비론이 인간을 죄가 덜한 죄인이 되도록 만든다는 도덕률 폐기론의 비난에 대해, 러더퍼드는 다음과 같이 대응한다, “준비는 죄의식이나 죄의 한 그램도, 20분의 1온스도 제거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의해서도 아니고, 약속에 의해서도 아니며, 값없는 은혜의 실행으로, 이처럼 준비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가 또한 그것을 부인한 후에... 은혜의 전능성은 죄에 있어서 좀 더 용서할 수 있고 덜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 그렇다, 의도적으로 은혜를 드높이기 위해서, 죄악은 은혜와 씨름해야 할 것이고, 압도당해야 할 것이며, 이방인들은 익어, 희고 노랗게 된 옥수수와 같이 되어서, 낫이 그들을 베어내기 전에, 회심해야 한다.”(요 4:35)
따라서 지혜의 문에 누워서 예기치 못한 시간에 닥칠 그리스도의 물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마지막 아름다운 길은 타락한 성도를 구덩이 밖으로 끌어내는 그리스도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관련된다. 아가서처럼, 상사병이 있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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