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Q.T가 아닌 청교도 묵상인가.①
(부제: 강한 그리스도인은 가장 잘 묵상하는 자이다)
1. 들어가는 말
영적성장은 신자들의 기독교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벧후 3:18 “우리 주 곧 구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권면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기름부음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살아나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위의 것을 찾는다”(골 3:1).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성장이 당연히 기대가 되는데 그 이유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HK 32, 45, 49, 6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물은 영적 지식을 계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도 활동에 극히 필수적인 예비단계이자 보조 업무”로 간주되었던 묵상이라는 단어가 비성경적인 뉴에이지 영성, 큐티, 관상기도, 명상 등의 거짓 종교로 왜곡되어 있다.
▶ 오늘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적은 이유
세상에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가 힘든 이유는 성경적인 올바른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묵상의 의무는 거의 시대착오적인 관습처럼 취급되고 있다. 특히, 청교도 묵상은 그 시대에나 가능했던 것처럼, 오늘날처럼 분주한 가운데, 특히나 기독교 가치관으로 세워지지 않은 우리나라 사회구조 배경에서는 더더욱 하기 힘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리 분주하고, 사회구조가 그렇다고 해도 토마스 맨턴을 말을 빌리자면, 죄악된 불안정한 기질과 사회환경, 상황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무를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마치 종이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할 일을 면제받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마귀는 묵상의 적이다. 그는 사람들이 말씀을 얼마나 많이 읽고 듣느냐 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귀는 묵상이 마음을 변화시켜 은혜로운 심령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더라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마귀는 묵상이라는 강력한 총알 외의 작은 총알은 거뜬히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문드 칼라미는 “참된 묵상은 묵상할 때 그리스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변화되게 하며, 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어 묵상을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개의 문(지성, 마음과 감정, 실천적 삶의)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묵상을 매일 이행해야 할 의무는 기계에 윤활유를 바르는 것처럼 묵상도 은혜의 수단(성경 읽기, 설교 듣기, 기도,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모든 규례)을 부지런히 사용하도록 돕고, 은혜의 표지(회개, 신앙, 겸손)를 더 깊이 있게 하며,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하나님에 대한 사랑, 동료 그리스도인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강화시켜 준다.
참고서적: 묵상의 산에 오르라(토마스 왓슨), 이것이 기독교인의 묵상이다(에드문드 칼라미),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청교도의 묵상실천"(조엘 비키)
이동훈 목사는 안양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한 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Th.M) 조직신학 석사과정 중에 있으며,
현재 마르투스 출판사 대표 및 예수안에 하나교회 교육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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