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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박채동

예장 대신 신원균 목사 ‘확증편향’을 지적함

by 깨우는자동훈 2023. 8. 5.

{유튜브} 신원균 [회심 준비론 용어가 개혁파 조직신학책에 없다 (1)]

https://youtu.be/P_pX02G7SwU

 

 

   위 동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지 않았지만, “회심 준비론 용어가 개혁파 조직신학책에 없다.”는 예장 대신 신원균 목사 주장은 옳은가를 살펴보자. ‘회심 준비’의 동의어는 ‘준비(예비) 은혜’다. 그러면 ‘준비(예비) 은혜’라는 용어가 나오는 책들, ‘준비 은혜론’을 [제50장: 소명과 중생]에서 설명한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1)과 [제10장: 보통 은혜]에서 설명한 ‘존 머레이 {조직신학}’2)은 “개혁파 조직신학책”이 아닌가?

 

    사실이 이러함에도, 위 동영상 ‘17분: 00초’ 이후에서 신원균 목사는 ‘개혁파 정통 교리 준비 은혜론’을 “청교도 회중파 회심 준비론”이라는 말로 폄훼한다. 그리고 알미니안 신학 영향을 받은 ‘감리교’를 언급하면서 이른바 “청교도 회중파 회심 준비론”을 ‘알미니안(항론파, 항변파) 회심 준비론’과 똑같은 준비론으로 주장한다. 다음은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제4권} 31쪽~32쪽3)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8)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르심은 단지 억제하는 은혜일 뿐만 아니라 ‘예비 은혜 gratia praeparans’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심판(헬라어 생략)하기 위해,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막 4:12. 눅 2:34. 8:10. 요 3:39. 15:22. 고후 2:16. 벧전 2:7,8) 율법과 복음을 통한 부르심의 목적은 또한 부르심이 제공하고 작용하는 모든 것을 통해 인류와 개별적 인간 안에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이다. 항변파 의미의 그러한 예비 은혜는 개혁파에 의해 단호하게 거부됐다. 중생 가운데 심긴 영적 생명은 이 생명에 선행하는 자연적 생명과 도덕적 생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인간의 활동이나 진화로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중생에 선행하는 활동들을 ‘예비 행위들 actus praeparatorii’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선행 행위들 actus antecedanei”이라고 불렀다. 그러함에도 좋은 의미에서 ‘예비 은혜’를 언급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심지어 자연적 생명을 무시하는 모든 감리교적 경향에 맞서 탁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예비 은혜를 고백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즉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열망하는 것 같은 적정공로(適正功勞, meritum de congruo)로써 중생의 은혜를 얻거나 혹은 인간 자신이 중생의 은혜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 어이가 없고 웃픈 것은 위 동영상에서 신원균 목사 손에 있는 책이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원광연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이라는 것이다. 다음은 이 책 ‘중쇄판(2014년 9월 20일)’ 77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이른바 “회중파 청교도”들 시대 이전에 태어난 분이시라서 회중파 청교들과 전혀 관련이 없으신 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공동 저자이신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목사님께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답>을 해설하신 일부분이다. ‘중생(회심)한 인간의 상태’가 아닌 ‘중생(회심)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신 부분, 준비 은혜를 설명하신 부분이다.

율법의 선고로 말미암아 슬픔과 절망이 우리에게 생기게 되는데, 복음의 위로가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우리의 중보자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죄 씻음을 받기 전에는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된 상태를 알게 된다. 또한 우리가 영원한 정죄 아래 있음도 알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 비참함의 둘째 부분을 이룬다. 이 논지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또한 순종을 이행하지 않을 시에는 영원한 형벌과 정죄를 선고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이 순종을 이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모든 사람을 영원한 정죄 아래 두는 것이다.

 

   더욱더 웃픈 것은 위 동영상에서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을 손에 든 신원균 목사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88문~제90문>’을 설명하며 ‘개혁파 정통 교리 준비 은혜론’을 ‘청교도 회중파 교리 = 알미니안파 교리’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을 손에만 들었을 뿐, 그 내용은 읽지 않은 불성실을 뜻한다. 예장 대신 신대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조직신학 교수답지 않은 불성실에 따른 직무유기를 뜻한다. 설령 읽었더라도 ‘예장 합동 확증편향 중증 환자 정이철 목사’와 똑같이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다음과 같은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목사님 설명’은 신원균 목사 눈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 점에서 신원균 목사는 ‘제2의 정이철 목사’, ‘예장 대신의 정이철 목사’다. 다음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제88문~제90문> 해설로서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746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배경색은 내가 칠한다.

후회 역시 회심보다 앞서지만, 회심 그 자체는 아니요, 회심의 일부도 아니며, 다만 회심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준비 단계일 뿐이며, 그것도 택함을 받은 자의 경우에만 그렇다. …(중략)… 죄를 아는 지식이 비애보다 앞선다. 왜냐하면 마음의 감정이 지식에 뒤따라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불경한 자들의 편에서는 죄에 대한 지식에 이어서 비애가 뒤따른다. 현재의 악이나 미래의 악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적인 징벌과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비애는 회심의 일부도 회심의 예비 단계라 볼 수도 없고, 가인이나 사울, 유다 같은 경우에서 보듯이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요, 그분에게서 돌아서는 것이, 절망 속으로 돌진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회심의 예비 단계라 볼 수도 없고”는 유기된 자들에게 적용해야 한다. 예정(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적용할 경우에는 “그것도 택함을 받은 자의 경우에만 그렇다.”에 비춰 ‘회심의 예비(준비) 단계’로 독해하면 된다. 다음은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750쪽에서 옮기는 글이다.

    회심의 도구 혹은 수단적 원인은 율법과 복음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율법의 교리요 그 다음에 복음의 교리다. 율법을 선포하는 것이 먼저 있어서 우리를 준비하게 하시고, 또한 복음에 관한 지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므로 율법이 없이는 죄에 대한 비애나 슬픔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죄인이 먼저 죄에 관한 지식을 갖도록 인도받음 다음에 복음의 선포가 뒤따라 이어져서,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관한 확신을 줘 후회하는 마음을 격려하는 것이다. 이런 선포가 없이는 믿음도 없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없고, 따라서 그 사람에게 회심도 없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 다음에, 다시 율법의 선포가 뒤따라서, 율법이 우리 감사와 우리 삶의 규범이 되도록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회심보다 선행하고, 또한 회심 뒤를 따르기도 한다. 율법은 죄에 관한 지식과 비애를 갖게 되도록 회심보다 앞서서 주어지며, 회심한 자에게 삶의 규범이 되도록 회심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불경한 자들에게 먼저 죄를 책망하며 형벌을 경고하며 회개를 권면하고, 그 다음에 용서와 사면을 약속해 위로를 주고, 또한 마지막으로 경건의 의무를 권면한 것이다. 세례 요한 설교 성격 역시 그와 같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회개의 선포가 율법과 복음을 다 포괄한다. 그러나 회심을 이루는 데에는 율법과 복음이 각기 자신의 독특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께서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롬 3:20)은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 선생이다.’(갈 3:24)고 하셨건만, 정이철 목사처럼 무식하면 용감하고, 정이철 목사 같은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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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제4권} 박태현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1) 23쪽~103쪽.

 

    2) 존 머레이 {조직신학 제2권} 박문재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105쪽~130쪽.

박 채 동

박채동은 1981년 개혁광주신학교(현 광신대학교대학원)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에 속한 교회에 성도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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