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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인물/정이철

“지나가는 개가 웃는다.”는 속담이 생각난 성탄 아침: 율법(모세)은 복음(예수님)과 함께한다.

by 바른신앙지기 2022. 1. 7.

{바른 믿음} 정이철 <웨신서, 성경, 서철원에 의하면 이동훈(마르투스)의 회심준비론은 거짓 사상>

https://archive.ph/okJbI

 

  “서철원 박사의 개혁 신학” 성탄 아침에 자칭 “박채동”을 웃음 짓게 만든 글이다. ‘율법’과 ‘복음’을 분리하며 ‘구약 시대는 행함으로, 신약 시대는 믿음으로’라는 세대주의 신학 잔재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 그 신학에 새 관점 신학까지 짬뽕해 버린 ‘서철원 신학’, ‘잡탕 신학’을 정이철이 위 링크 글에서 “개혁 신학”이라 하니, 박채동이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 링크 글에서 정이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십자가 이후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 준수 요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것이므로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약 백성들도 구약의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게 된다. 그런데 구약 백성들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그것이 이루어진다. 구약의 백성들은 육신의 힘과 이성의 노력으로 율법을 준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이므로 율법의 요구를 완전하게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엄밀히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장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구약의 백성들은 육신의 힘과 이성의 노력으로 율법을 준수해야 했다.” 구약 성도들인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은 신약 성도들인 우리보다 더 믿음이 뛰어나셨던 분들, 신약 성도들 믿음의 조상이시건만, ‘잡탕 신학으로서 서철원 신학’은 ‘구약시대에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 믿음과 성결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약 성도들 마음속에 내주(in)해 역사하신 시대가 아니었고, 그들 위(upon)에 역사하신 시대였음’을 주장하는 신학이기에, 그 귀결로서 이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칼빈 선생님 가르침을 보자. 다음은 ‘존 칼빈 {로마서 주석}’ <로마서 8장 15절 주석>에서 옮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거나, 율법을 받은 모든 사람이 다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살았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율법 아래에 있던 사람들과 지금의 사람들이 아니라, 율법의 직무와 복음의 경륜을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 링크 글에서 정이철은 {서철원 박사 교의신학 제1권: 신학서론} 200쪽을 인용해 ‘개혁 신학 준비은혜론’을 이단시한다. 그 인용은 다음과 같다.

 

  종교개혁의 복음과 율법의 관계 이해는 구원서정적으로 이루어졌다. 루터의 이해에 의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는 복음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율법을 선포해야 한다 …(중략)…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을 향한 전도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만 선포함으로 그들을 믿음으로 인도하였다. 베드로도 유대인들에게 선포할 때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선포함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였다. 그는 복음 선포에 앞서 율법의 정죄를 선포하지 않았다.

 

   바울 사도님께서는 로마서 1~3장에서 율법의 정죄를 선포하심에도, 서철원 목사님 확증 편향에 따른 이 주장은 사도행전 7장에서 “모세 율법과 선지자 말을 가지고 예수님”을 증거하셨던 스데반 집사님, 유대인들에게 그들 죄를 지적하며 율법의 정죄를 선포하셨던 스데반 집사님께서 웃으실 주장이다. 물론, 스데반 집사님 강설을 들으시며 ‘저항할 수 없는 성령의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헛발질(생고생)을 하셨던 바울 사도님(행 26:14)께서도 스데반 집사님과 함께 웃으실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해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 26:14 하)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해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 율법과 선지자 말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 권하더라. (행 2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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